페브리즈 겉면에 성분 비공개…법으로 공개 의무화 안 한 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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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이 금지된 화학물질을 쓰거나 유해물질을 함량 기준보다 40배나 초과한 탈취제·세정제가 지난달까지 버젓이 시중에 유통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느냐”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을 시행하는 등 화학제품 관리체계를 개선해 왔다고 밝혔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면서다.

탈취제엔 13개 물질 제한해놓고
공개 의무 물질은 1개만 지정
“성분·함량 공개토록 법 바꿔야”

이는 무엇보다 화평법이 법제화 과정에서 성분 공개조차 제조사에 강제할 수 없는 ‘허수아비 법’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라는 게 환경단체·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이다. 법 제정 단계부터 화학제품 관리를 강화하려는 정부 의지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화평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 다섯 달 뒤인 2013년 9월 제3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화평법으로 인한 기업 부담과 관련해 “규제 강화의 기본 취지는 이해하지만 민관 협의체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해 (기업에) 과도한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화평법에 따른 시행령과 시행규칙 마련을 앞둔 상황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에 더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취지가 좋다고 세부적 부분에서 소홀해지면 악법이 된다”고도 했다. 이후 2015년 법이 시행되기까지 보건의학계·환경단체 등이 요구한 ‘화학제품 성분 공개 의무화’는 화평법과 관련 규칙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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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다 보니 탈취제 등 화학제품 표기에서는 화학물질명조차 보기 어렵게 됐다. 본지가 한국P&G의 ‘페브리즈’ 제품을 확인한 결과 제품 뒷면의 성분 코너에 ‘물·건조제·탈취제·용매·계면활성제·미생물억제제·pH조절제·향료’라고 적혀 있을 뿐 구체적인 화학물질 성분명은 하나도 공개돼 있지 않았다. 탈취제는 공산품 중에서도 위해 우려가 매우 높아 환경부가 지난해부터 ‘위해우려제품군 15종’ 중 하나로 관리하고 있다.

환경부는 지난해 4월 만든 ‘위해우려제품 지정 및 안전·표시 기준’에서 제품별로 꼭 지켜야 할 화학물질 함량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탈취제의 경우 벤젠·포름알데히드·나프탈렌 등 13개 물질을 열거했다. 벤젠·나프탈렌은 대표적인 발암물질이다. 하지만 13개 중 환경부가 탈취제 공개 의무 물질로 정해놓은 것은 아세트알데히드 하나뿐이다.

방향제도 함량 제한 물질 5종 가운데 공개 의무 물질은 하나도 없다. 소독제·방충제·세정제·표백제·접착제 등도 마찬가지다. 시중에 유통 중인 화학물질은 4만여 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성분 공개를 의무화한 물질은 35종뿐이다.

시판 중인 한 방충제는 제품상 성분 표기에 ‘방충제·향료·산화방지제’ 등으로만 적어놨을 뿐 화학물질명은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제품 모두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 화평법과 관련 기준이 성분 공개를 의무화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임종한 인하대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관련 업계가 ‘영업기밀’ 등을 내세워 성분 공개를 꺼리며 법제화를 반대하면서 화평법에서 성분 공개 의무화 조항이 빠진 것”이라며 “위해성이 높아 함량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화학물질만큼은 제품에 성분 유무와 함량을 공개하도록 관련 법령을 시급히 바꿔야 ‘제2·제3의 옥시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성시윤·황수연 기자 sung.siy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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