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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에 사랑을 실어 놀이를 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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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호 8 면

어린이는 미래를 이끌어갈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과 달리 현실 속에서는 약자이자 부모와 어른의 보호와 통제를 받는 존재, 즉 비독립적인 대상으로 취급받는다. 물론 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것과 별도로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미숙한 존재의 그것이라는 인식에 따라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에 따라 아이들이 사용하는 옷과 가구와 장난감은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했다기보다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아이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을 반영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들의 생각이나 감정, 발달 상황을 전혀 무시한 채 아이들 용품을 디자인하진 않는다. 어린이를 위한 디자인에는 분명 어른의 처지에서 본 아이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사려 깊은 이해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금호미술관에서 9월 11일까지 열리고 있는 ‘BIG: 어린이와 디자인’전이 그렇다. 어린이를 위한 디자인 250여 점을 볼 수 있는 이 전시회에서 어린이용 가구는 시대마다 또는 디자이너마다 어린이에 대한 어른 디자이너들의 관점을 보여준다. 그들은 아이를 ‘몸이 작은 어른’으로 보기도 하고, 어른과 다른 특성을 가진 고유한 존재로 보기도 하며, 가장 에너지 넘치고 아직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은 건강한 존재로 보기도 한다. 어린이를 위한 디자인에도 시대별 주요 모더니즘 양식의 이념이 새겨져 있고, 시대별 기술의 발전이 반영돼 있다. 어린이에 대한 어른들의 관점과 사랑과 이해는 디자인을 통해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1 토넷 체어(디자인: 미하엘 토넷, 오스트리아, 1859년) 2 모스키토 체어(아르네 야콥센, 덴마크, 1955)

3 B5 체어(마르셀 브로이어, 독일, 1926)

18세기까지 아이들 위한 의자 만들지 않아 디자인의 역사를 바꾼 의자들이 이번 전시에서도 여럿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1859년부터 생산된 토넷 의자는 대량생산 방식을 적용한 최초의 의자다. 그 토넷 의자를 1/2로 축소한 듯한 앙증맞은 의자를 보면서 아이를 볼 때 느끼는 ‘아,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어른들을 위해 디자인된 것을 형태와 재료 그대로 어린이의 신체 조건에 맞게 줄여놓은 가구는 어떻게 보면 성의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어린이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18세기까지는 아예 어린이를 위한 의자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시의 아이들은 어른 의자에 다리가 공중에 붕 뜬 채로 앉아 있어야 했던 것이다.


어른 의자의 단순 축소형 의자들은 19세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다. 서구사회도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어린이를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20세기의 몇몇 명작 모던 의자들도 어린이용으로 생산됐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아르네 야콥센이 디자인한 ‘모스키토(Mosquito)’는 강철관과 합판으로 제작되고, 등받이도 최소한의 크기로 되어 아주 가볍다. 어린이 의자에서 무게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어린이 스스로 의자를 옮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 축소형이라도 이런 점들이 고려되었다는 것은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4 코끼리 의자(찰스 & 레이 임스, 미국, 1945) 5 흔들 목마 의자들

6 어린이 하이체어(나나 디첼 & 요르겐 디첼, 덴마크, 1955)

모든 프레임 둥글게, 발판은 높이 조절 가능 어린이 하이체어는 나나 디첼과 그의 남편 요르겐 디첼이 쌍둥이 딸을 위해 디자인한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의자 곳곳에 배어 있다. 의자의 모든 프레임을 둥글게 한 것은 손으로 만졌을 때 기분이 좋게 한 것이다. 유아들은 신체 접촉을 통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점을 고려했다. 발판은 아이의 성장에 따라 높이를 조절할 수 있다. 나나는 의자를 디자인할 때, 의자에 누가 앉아 있는지, 그 사람과 결합된 의자의 모습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의자는 아이들이 앉았을 때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띠게 된다.


이렇듯 어른 의자의 단순 축소형이 아니라 오직 어린이의 신체 조건과 발달 정도를 고려한 의자 역시 19세기부터 생산됐다. 유아용 식탁 의자로서 디첼 부부의 하이체어는 최고의 디자인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전시에서 어린이만을 위한 가구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흔들 의자다. 흔들 의자는 성인을 위한 것도 있지만 그 기원은 15세기에 등장한 흔들 요람이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엄마 품에서 편안하게 잠드는 아기의 특성을 반영해 인공물로 만든 것이다. 18세기를 전후로 흔들 요람으로부터 진화한 것이 어린이용 흔들 목마다. 의자가 흔들린다는 특성은 어린이를 위한 것처럼 보인다. 재미있으니까. 흔들 목마는 말하자면 의자라기보다 타고 노는 장난감에 가깝다. 어린이를 위한 것이므로 주로 말이나 동물의 몸처럼 디자인해 어린이 용품이라는 것을 기호화했다.


하지만 흔들리는 물체에 앉아 있는 것은 어른들에게도 즐거움을 준다. 옛 추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흔들 목마는 금세 어른들을 위한 흔들 의자로 진화했다. 어린이는 어리고 미숙한 존재지만, 어른 역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장한 다음에도 어린이의 품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7 라펠키스트 키드 유니트 (루이지 콜라니, 독일, 1975)

8 시츠거래트 콜라니 (루이지 콜라니, 독일, 1971) 9 미끄럼틀 이글루 (귄터 벨치히, 독일, 1972)

몸 숨기고 사다리 타고 오르는 재미 그러나 많은 어른들이 어릴 적 기억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아이들을 자기식대로 길들이려 한다. 창조적인 사람들일수록 어린이의 마음이 유지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독일 디자이너 루이지 콜라니가 그런 사람이다. 그가 디자인한 어린이 가구 ‘라펠키스트(Rappelkiste)’를 보자. 커다란 사각 프레임 안에는 옷장이 있고, 의자와 탁자, 물건을 담을 수 있는 주머니가 있다. 의자와 탁자는 성장 속도에 따라 높이를 조절할 수 있다. 매우 실용적인 가구로 보이지만 사실 놀이기구에 가깝다. 몸을 숨길 수 있고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 라펠키스트는 직역하면 ‘열광’ 또는 ‘광란의 상자’다. 그러니까 그 안에서 실컷 떠들썩하게 놀라는 의미다. 이 가구에는 어린이들의 과잉행동을 장애로 취급하는 오늘날의 관점과 달리 그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담겨 있다.


루이지 콜라니의 또 다른 가구인 ‘시츠거래트 콜라니(Sitzgerat Colani)’는 책상과 의자를 유기적으로 결합했다. 책상 위에 뭘 올려놓을 수도 있지만 이 책상을 등받이로 기댈 수도 있다. 대단히 융통성 있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물에 뜰 정도로 가볍다.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모든 모서리는 둥글다. 이런 성질들은 이 가구를 아이가 갖고 놀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가구 역시 놀이기구에 가깝다. 가구에 놀이의 개념을 넣는 것이야말로 어린이 가구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10 강철관 어린이 학교 책상(네덜란드, 1942) 11 조절 가능한 1인용 책상(장 프루베, 프랑스, 1952) 12 책상과 의자(아르네 야콥센, 1955)

두꺼운 강철판으로 내구성 강화하기도 장 프루베가 디자인한 학생용 일체형 의자와 책상은 어린이 가구답지 않게 대단히 투박해 보인다. 강철관과 합판이 주 재료다. 강철관은 1920년대 중반 바우하우스에서 처음으로 의자의 재료로 쓴 뒤 모더니스트들이 가구의 재료로 즐겨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볍고 견고하다는 점뿐만 아니라 얇은 강철관이 세련돼 보인다는 점도 모더니스트의 사랑을 받은 이유다.


하지만 프루베의 어린이용 가구에 쓰인 강철관은 매우 두꺼워서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장 프루베는 학교나 공공기관으로부터 많은 수량의 책상과 의자 제작을 의뢰받았다. 그는 이 주인 없는 공공재가 거칠게 다루어지는 것을 염려했다. 게다가 책상 위에 올라타고 발로 차고 집어던지기까지 하는 어린이의 거친 행동을 고려할 때, 그들을 위한 가구는 무엇보다 내구성이 중요하다고 간파했다. 그래서 보통 가구에 쓰이는 것보다 훨씬 강한 재료를 사용했다. 여기에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의 신체 특성을 반영해 의자와 책상의 높이까지 조절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전시장의 다른 어린이용 책걸상들을 봐도 무엇보다 안정감과 튼튼함을 우선 조건으로 디자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이 가구들이 못생긴 것은 결코 아니다. 거칠지만 튼튼한 아이들처럼 건강하고 구조적으로 안정된 아름다움이 이 의자들의 미학이다. 그런가 하면 아르네 야콥센이 디자인한 어린이 책상과 의자는 간결하고 실용적이다.

13 체어 68(알바 알토, 1935) 14 적층의자(마르코 자누소 & 리하르트 자퍼, 1960) 15 리사이클 플라스틱 의자(트리오 베르 & 크넬, 1994)

16 바우하우스 요람(페터 켈러, 1922)

도형만으로 디자인한 바우하우스 특징도 눈길 바우하우스의 학생이 디자인한 커다란 요람은 요람 치고는 괴상하게 생겼다. 형태는 원과 삼각형, 사각형만으로 구성되어 마치 쐐기 같다. 물론 안에는 받침대가 있어서 아기의 몸이 쐐기 끝에 끼이지는 않는다. 아무튼 이 특이한 조형은 기하학의 기본 도형만으로 디자인을 하려는 바우하우스의 강박적인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체어 68은 ㄱ자로 구부러진 ‘L-leg’가 적용돼 있다. 이것은 다리와 상판을 대단히 튼튼하게 연결해주는 혁신적 기술이다.


그런가 하면 마르코 자누소와 리하르트 자퍼가 디자인한 적층의자는 어른 의자의 축소형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린이용으로 디자인되고 생산됐다. 플라스틱으로 집안의 다양한 제품들을 만들던 이탈리아의 카르텔은 플라스틱 가구를 제작하기로 하고 최초로 생산한 것이 바로 이 어린이용 적층의자다. 1960년 생산된 이 의자는 최초의 사출성형 플라스틱 의자로서 역사적 전환점을 만든 것으로 평가받는다.


전시장의 어린이 가구 하나하나를 볼 때 그것은 오브제처럼 보인다. 너무 작고 연약하고 귀여워서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장식품으로 집안을 꾸미고 싶어진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것은 엄연히 유용한 물건이고 나아가 놀잇감이며 호기심의 대상이다. 그래서 20세기의 디자이너들은 단지 작게만 디자인하지 않고 아이의 정신적 신체적 특성을 배려해 디자인해 왔다. 20세기 어린이 가구의 흐름은 어른들이 아이다움을 존중하고 발견한 역사이며, 아이에 대한 어른의 사랑과 이해의 깊이를 더해온 역사다. ‘BIG: 어린이와 디자인’전이 그것을 가르쳐준다. ●


글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kshin2011@gmail.com,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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