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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The New York Times

농담할 줄 아는 대통령이 국민에 사랑받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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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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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리트
작가

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문을 써 온 워싱턴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지난해 오바마는 백악관 출입기자단과의 만찬을 앞두고 자신의 ‘분노 통역사(언론에 대한 오바마의 불만을 대신 얘기해 주는 역할)’와 리허설을 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오바마는 분노 통역사인 ‘루터(키건 마이클 키 역)’와 입을 맞출 기회가 한 번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바마의 리허설은 뛰어났다. 대사 전달력도 좋았고 “기후변화는 없다”는 보수진영에 대해 반박하는 대목에서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연기도 무난히 마쳤다. 문제는 루터였다. 루터가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마다 오바마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무릎을 찌르면서 “참아야지”를 연발했다.

오바마, 망가지는 연기력 탁월
개그를 정책 홍보에 적극 활용
파티 앞두고 농담 수백 개 준비
‘웃겨야 먹힌다’ 본능으로 알아

다행히 오바마는 기자단과의 연례 만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개그맨 역할을 실수 없이 해냈다. 클린턴이건 부시건 대통령이 누구라도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 주면 그 자체로 국민은 재미를 느낀다. 하지만 오바마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개그에 소질이 있다. 그는 청중의 취향과 타이밍을 짚어 내는 센스가 탁월하다. 그래서 오바마의 보좌진은 그의 유머를 동영상으로 만들어 퍼뜨렸다. 이는 오바마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도움이 됐다. 대통령의 농담이 정책 추진의 효과적 도구가 된 것이다.

내가 2011년 백악관 작가로 일할 때만 해도 오바마는 트위터 계정이 없었고 페이스북 라이브나 스냅챗도 없었다. 대통령의 농담이 허용돼 온 만찬장 이외의 장소에서 오바마가 개그를 하는 게 정치에 도움이 된다는 증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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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3년 뒤인 2014년 전환점이 마련됐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가 작동하기 시작한 때다. 청년층은 아직도 이 제도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오바마는 온라인 막장 토크쇼 ‘양치류 가운데서(Between Two Ferns)’에 출연했다. 의료보험 가입을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토크쇼 진행자는 오바마를 고사리(양치류) 사이에 앉혀 놓고 “미국 사상 최후의 흑인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 같다. 기분이 어떠시냐”는 막장 조크를 던졌다. 오바마는 “그래서 의료보험만큼은 확실히 만들어 놓고 물러나려 한다”고 응수했다.

그 결과 쇼는 당일 조회 수 1100만을 돌파했고 새 의료보험에 2000만 명이 가입했다. 오바마의 토크쇼 출연이 의료보험 확산에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이후 오바마의 ‘개그 정치’는 불이 붙었다. 인기 토크쇼 ‘콜버트 리포트’에 진행자로 나서는가 하면 배우 제리 사인펠드와 함께 코르벳 스포츠카를 타고 백악관 남쪽 정원을 질주하는 쇼를 하기도 했다.

오바마가 가장 자주 하는 조크는 ‘셀프 디스’다. 나날이 느는 흰머리부터 롤러코스터를 타는 지지율까지 자신의 모든 게 농담 소재다. “올해는 내 지지율이 상승해 대통령 욕으로 먹고사는 코미디언들이 힘들게 사네요” “공화당은 늘 소수민족에게 손을 내밀어 주자고 한다. 눈앞에 있는 소수민족(오바마)부터 챙길 것이지.”

하지만 아무리 유머감각이 있는 오바마도 농담으로 삼기 꺼리는 소재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작가인 내가 다루면 안 된다. 무엇보다 안보 문제는 거론 자체가 금지돼 있다. 영부인 미셸과 자녀들에 대한 조크도 극히 가벼운 언급만 가능하다. 인기 코미디언들의 말투를 흉내 내 야당(공화당) 지도자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오바마가 “진짜 코미디언들이 그런다면 몰라도 내가 하면 썰렁의 극치일 것”이라며 반대했기 때문이다. 워싱턴시 당국이 마리화나 흡연을 합법화한 조치나 야당의 필리버스터 시도는 조크의 대상으로 1순위감이다. 하지만 이 역시 오바마는 거절했다. 그가 막무가내로 거부한 건 아니다. 왜 이런 소재들이 농담거리로 좋은지에 대해 내가 열심히 설명하자 그는 묵묵히 경청했다. 그러나 이 소재들을 갖고 시범 케이스로 농담을 만들어 보니 수준이 조잡했다. 오바마가 현명했던 것이다.

올해 백악관 출입기자단 만찬은 오바마로서는 8년 임기 중 마지막이다. 나를 포함해 백악관 안팎에서 대통령의 연설문을 작성해 온 작가들은 수주일에 걸쳐 수백 개에 달하는 농담 아이디어를 오바마에게 제출했다. 심사를 통과한 35~40개의 최종 후보작을 아는 이는 나와 함께 일해 온 동료 작가들 가운데 극소수다. 대통령이 만찬 도중 던지는 짧은 농담 중 상당수는 지난 8년을 돌아보는 내용들이다. 2008년 미국을 휩쓴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되살아난 경제와 전 국민 의료보험, 디트로이트(미국 자동차산업)의 부활 등 소재는 풍부하다.

대통령의 농담은 언제나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요즘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하는 채널은 매스컴을 넘어 인터넷·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여러 갈래로 쪼개졌다. 그래서 백악관이 유권자의 관심을 끌기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진 것이다. 하지만 오바마는 학창 시절 반에서 ‘웃기는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체득해 온 진리를 잘 알고 있다. 정치도 정책도 “웃겨야 먹힌다!”는 게 그것이다.

데이비드 리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