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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진이 소환한 20세기 발레 혁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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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30면

‘세레나데’ Photograph from Serenade, Choreography by George Balanchine ⓒThe George Balanchine Trust

국립발레단의 올해 첫 신작이자 강수진 단장이 세 번째로 선보인 초연 무대 ‘세레나데’ & ‘봄의 제전’은 강 단장 취임 이후 달라진 ‘국립발레단의 현재’를 웅변하는 무대였다.


국립발레단을 필두로 한 국내 발레계는 ‘백조의 호수’ 류의 클래식 레퍼토리 중심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모던 레퍼토리를 간간이 선보이긴 했지만 풀코스 정찬만 먹다가 호기심에 맛보는 별미요리 정도의 위치였다. 관객이 화려하고 스토리도 있는 클래식 무대를 선호한 이유도 있다. 하지만 주인공인 공주·왕자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엇비슷한 레퍼토리들로는 관객 저변을 넓힐 수 없고 발레 대중화의 길은 멀기만 했다.


강수진 단장은 2014년 취임 당시 “주역 한 두명이 아니라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빛나는 발레단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군무 위주의 모던 레퍼토리를 강화할 것이라 예측됐고, 첫 신작 ‘교향곡 7번’ & ‘봄의 제전’을 통해 그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작품 사이에 뚜렷한 관계성이 없어 1, 2부가 따로 노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에 우베 숄츠의 ‘교향곡 7번’을 걷어내고 조지 발란신의 ‘세레나데’와 글렌 테틀리의 ‘봄의 제전’을 한 무대에 세운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두 작품은 각각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라는 부제를 달아도 될 만큼 극명한 대조로 ‘발레’라는 커다란 세계를 그리면서 무용수 중심의 노선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봄의 제전’이 근육질 남성 무용수들의 야성미로 ‘발레리노란 이런 사람들’이라고 어필하는 무대라면, ‘세레나데’는 마치 드가가 그린 발레리나 시리즈를 보는 듯했다.


‘세레나데’는 ‘클래식 발레의 혁신가’로 불리는 발란신의 1934년작이다. 러시아 출신인 그가 미국에 정착해 뉴욕시티발레단을 만드는 과정에 설립한 ‘스쿨 오브 아메리칸 발레’의 첫 작품으로, 스토리와 무대 장치를 배제하고 고난도 기교를 중심으로 무용수의 몸과 춤 자체를 부각시키는 네오클래식 스타일의 원조다.


똑같은 로맨틱 튀튀를 입고 군무를 추는 17명의 여자 무용수들이 일견 클래식 발레에서 흔히 보는 ‘백색 발레’인가 싶지만, 전체로서 하나의 정적이고 선적인 아름다움을 이루며 솔로나 듀엣의 배경 역할을 하는 백색 군무와는 달랐다. 저들은 누구의 배경도 아니었다. 큰 무대에서 역할의 한계 때문에 제대로 기량을 뽐내지 못했던 이름없는 단원들이 마음껏 도약할 기회였다. 가볍고 빠르게, 모두가 주인공인 듯 점프하고 회전했다.

‘봄의 제전’ ⓒ Glen Tetley Legacy

2악장 이후 남자 무용수가 2인무, 3인무로 어우러지긴 했다. 차이콥스키의 서정적인 멜로디와 함께 남녀의 움직임이 감정적으로 다가들긴 했지만 어떤 스토리를 연상시키기보다 발레의 감성을 표현적으로 드러낸 장면이었다. 두 남녀의 즐거운 사랑으로 시작해 제3자가 끼어들면서 비극을 맞는 전막 발레의 패턴을 추상화한 셈이다.


이 와중에 흥미로운 것은 신인 박종석의 발견이다. 워싱턴발레단과 펜실베니아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을 거쳐 올해 국립발레단에 군무진으로 합류했지만 입단 4개월 만에 서열을 파괴하고 당당히 주역을 꿰찬 것이다. 4일 내내 무대 중심을 지키면서도 신인답지 않게 안정적이었고, 이어지는 ‘봄의 제전’에서도 놀라운 스태미나를 보여줬다.


‘봄의 제전’은 지난 두 차례 공연으로 완전히 몸에 익은 단원들의 들끓는 에너지로 꽉 찬 무대였다. 클래식에서 공주를 받쳐주는 왕자 정도로 인식되는 발레리노들이 역동적인 안무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무용수로서의 존재감을 한껏 발산하는 게 이 무대의 매력이다. 상징적인 의미도 강하다. 1913년 스트라빈스키의 불협화음에 맞춰 탄생한 니진스키 원조 버전이 발레에 대한 통념을 뒤엎은 예술적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경외감을 담아 이후 100년 동안 세계적인 발레단들이 저마다 재해석한 버전을 내놓았고, 1974년 초연된 글렌 테틀리 버전도 그중 하나다.


‘세레나데’나 ‘봄의 제전’이나 이미 고전이 된 레퍼토리들이다. 그러나 그 키워드가 ‘혁신’ 또는 ‘혁명’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불과 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 발레는 그간 압축성장을 달성해 왔다. 하지만 러시아 마린스키와 볼쇼이라는 양대산맥으로 대표되는 클래식의 원형을 무한 되풀이하며 중간 단계를 뛰어넘어 최신 컨템포러리로 양념을 치는 모양새는 균형감이 부족해 보인다. 그런 면에서 강수진 단장이 발레의 역사성에 주목해 ‘발레사의 혁명적 사건’들을 국내 발레계에 소환하고 있는 것은 의미있는 시도다. 고전이 된 20세기의 혁명을 레퍼토리로 축적한 21세기 국립발레단이 어떤 정체성을 갖춰갈지 주목되는 시점이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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