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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맛있는 지도] 외국인들은 HBC라 부르는 곳, 남산 아래 세계의 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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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통신이 ‘맛있는 골목’을 찾아 나섭니다. 오래된 맛집부터 생긴 지 얼마 안 됐지만 주목받는 핫 플레이스까지 골목골목의 맛집을 해부합니다. 빼놓지 말고 꼭 가봐야 할 5곳의 맛집은 별도로 추렸습니다. 이번 회는 경리단길 건너편 해방촌 골목길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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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실향민 거주지, 독특한 외국인 동네로
인근 경리단길 뜨면서 해방촌도 상권 확장
초창기 버거집 위주서 파인 다이닝도 생겨

올 들어 최고 기온을 기록했던 지난달 26일 오후, 노란색 대문과 보라색 담장이 있는 단독주택과 식당이 뒤섞인 길을 걸었다. 맞은편에서는 검은색 차도르로 온몸을 휘감은 중동 여인이 걸어왔고, 길 건너편에는 프렌치 불독을 데리고 산책하는 미니스커트 차림의 금발의 여성이 눈에 띄었다. 대낮부터 매캐한 장작 태우는 냄새를 풍기는 바비큐 식당의 테라스에는 미군 네 명이 앉아 고기와 맥주를 즐기며 영어로 수다를 떨었다. 블록마다 있는 슈퍼마켓 가판대를 들여다보니 코코넛 밀크, 향신료, 인도 쌀 같은 이국의 식재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한국적인 요소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독특한 풍경은 녹사평역 2번 출구를 지나면 나오는 해방촌 메인 대로다. 이 길의 정확한 명칭은 ‘용산구 용산동2가 신흥로’다. 하지만 택시를 타고 “해방촌 가 달라”고만 해도 기사는 다시 묻지 않고 여기에 내려준다.

‘포스트 경리단길’로 불리는 신흥로

해방촌 신흥로는 초입에 위치한 항아리 가게 ‘한신옹기’부터 시작해 약 500m 남짓 이어진다. 지대가 높아지기 시작하는 꼭대기 언덕까지가 요즘 부흥기를 맞이한 해방촌 메인 도로다. ‘포스트 경리단길’, 또는 외국인들 사이에 한글 약자로 ‘HBC’라고 불리는 이 길이 요즘 밤낮으로 붐빈다.

동네가 탄생한 건 1945년, 실향민들이 모여 판잣집과 함석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70년 전이다. 하지만 지금 해방촌은 지난 몇십 년간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동네가 됐다. 요즘 이곳은 스타일과 낭만을 즐기는 어른들의 놀이터다.

신흥로 위쪽 남산 언저리에는 지금도 집 한 채에 쪽방 다섯 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 옛날 집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데 바로 옆에는 패션지 모델 같은 바리스타가 손바닥만 한 가게 창문 틈으로 갓 내린 에스프레소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판다. 이런 풍경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신·구세대가 각자의 시대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공존하는 곳, 이게 2016년 해방촌의 진짜 얼굴이다.

2013년부터 해방촌 한가운데서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양경모 원장은 “2~3년 전에는 지금보다 더 히피스러운 곳이었다”고 회상한다. 길에서 술 마시고, 잠들고, 새벽에 깨서 집에 가는 외국인도 많았다. 하룻밤 즐기러 들르는 경리단과 달리 해방촌은 실제 이 동네에 사는 외국 주민이 오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인사하고, 맥주 마시고, 수다 떠는 화기애애한 이웃 동네 분위기. 그게 해방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10년째 해방촌 주택가에 거주하는 김명동(32)씨는 “원래 공영주차장이 없고 발레파킹 서비스가 아예 안 되는 지역이라 외부인 유입이 많지 않았는데, 요즘은 경리단 손님들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게 2013년 이후 약 2~3년간 일어난 변화다. 원래 해방촌은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르카페’ ‘필리스’ ‘자코비버거’ ‘해크니’ 같은 식당이 전부였는데 최근 트렌디한 식당이 늘어났다. 해방촌 신흥로의 끝자락이라 할 수 있는 언덕에서 프렌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김모아 셰프는 “2014년 처음 가게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언덕까지는 상권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셰프의 설명에 따르면 그사이 바 ‘트웰브’나 ‘토스트 프랑세’ 같은 식당이 언덕 주변에 생겨났고, 언덕 위쪽까지 상권이 확대될 조짐이 보인다.

처음 왔다면 클래식 맛집부터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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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의 이국적인 분위기로 꾸민 ‘카사블랑카’ 내부.

해방촌에 거주하는 여행 전문지 ‘트레블러’의 여하연 편집장은 “한두 번 와서는 현지인이 즐겨 찾는 식당을 알기 어렵다”고 했다. 자주 와서 분위기를 익히면 진짜 식당과 트렌드에 맞춰 문을 연 식당이 보인다는 게 해방촌을 즐기는 팁이다. 해방촌 식당은 손님과 주인의 관계도 다른 동네와 다르다. 처음 온 손님도 10년 온 손님처럼 반갑고 친절하게 맞아준다. 음식 얘기부터 동네에 열리는 벼룩시장이나 축제 정보까지 공유하는 게 이곳 레스토랑의 역할이다. 주인과 수다를 떨다 보면 이곳 분위기에 매력을 느껴 다시 해방촌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곳의 맛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해방촌이 지금처럼 흥하기 전 이미 수많은 단골을 확보한 클래식 식당을 찾아가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곳은 1998년부터 버거와 감자튀김을 판 ‘필리스’다. 처음엔 미군을 대상으로 영업했지만, 지금은 진짜 미국 음식 맛을 내는 식당으로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손님 90% 이상이 외국인인 ‘르카페’는 갓 볶은 신선한 원두로 커피를 내려준다. 모로코 음식을 팔지만, 한국사람이 더 좋아하는 샌드위치 전문점 ‘카사블랑카’도 해방촌 터줏대감 식당이다. 동네가 외부인에게 알려지도록 도화선이 되어준 건 ‘내장 파괴 버거’로 유명한 ‘자코비버거’다. 화려한 그래피티가 그려진 힙합 카페 같은 분위기와 달리 빵과 패티, 채소와 소스까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맛에 충실한 수제버거집이다.

이 동네에 가장 많은 건 버거집이다. 자코비버거를 포함해 ‘밤스버거’ ‘버거마인’ 등 10여 개의 식당에서 대표 맛집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이지만, 각자 다 개성이 있어 어떤 집에 가도 만족할 만하다는 게 이곳 주민 김명동씨의 설명이다. 밤스버거는 ‘이태원 버거’ ‘남산타운 버거’ 등 동네 이름을 딴 작명이 특징이다. 버거마인은 DIY 버거 바를 운영한다. 1시간반 동안 원하는 재료로 만든 버거를 무제한 먹을 수 있다. 다양한 버거를 맛볼 수 있도록 미니 버거 샘플러도 판매한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두 곳은 요리연구가 이종국씨에게 사사한 김지운 셰프의 이탈리아 식당 ‘쿠치올로’, 프랑스에서 10년간 살다 온 김모아 셰프의 ‘꼼모아’다. 분위기는 편안하지만 음식 수준은 미쉐린 가이드 식당 못지않다. 특히 지난해 문 연 쿠치올로는 2주 넘게 예약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 높은 식당이다. 인근 주민들도 많이 오지만 SNS 사진을 보고 다른 동네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 합리적인 가격에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도 눈에 띈다. 330g짜리 빅사이즈 스테이크를 한정 판매하는 ‘라구’, 한쪽에서는 칵테일을 만들고 한쪽에서는 스테이크를 굽는 이색 스테이크 레스토랑 ‘올드 나이브스’가 있다.

한잔하기 좋은 퇴근길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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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해방촌 일대 풍경.

전문적으로 술만 파는 바는 많지 않다. 식사와 술을 함께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최근 몇 개의 ‘핫’한 바가 이 거리에 새로 생겼다. 간판 없는 커다란 까만색 대문 꼭대기에 로마 숫자로 1부터 12까지 쓰여 있는 ‘트웰브’가 그중 하나다. 바에 딱 열두 자리가 있는데 손님이 한 명 있으면 1번 숫자에 불이 들어오고, 만석이면 열두 개 숫자의 불이 다 꺼지는 독특한 콘셉트다. 위스키부터 칵테일까지 다양한 술을 판다. 대로변 한가운데 있는 ‘더콩코드’는 검은색 외벽이 세련된 느낌을 준다. 안으로 들어가면 독특한 그림과 거울, 어두운 조명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늦은 밤 퇴근하는 ‘혼술족’(혼자 술마시는 사람들)이 잠깐 들러 목을 축이기에도 좋다.

해방촌 신흥로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거나 테라스에 개와 함께 앉아 있는 외국인이 유독 많은 거리이기도 하다. 반려견과의 삶이 익숙한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기 때문에 식당에 개를 데리고 출입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하지만 개의 배설물을 치우거나 강아지가 짖으면 엄하게 꾸짖는 등 공공장소에서 반려견을 관리하는 태도는 수준이 높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대형견 견주들이 자주 드나드는 ‘펫츠 그라운드’라는 카페가 있지만, 꼭 거기가 아니라도 반려견과 함께하기에 불편함 없는 동네가 바로 해방촌이다.

해방촌 대표 맛집

꼼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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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프랑스 낭트로 떠나 약 10년간 현지에 머무르며 요리사로 일한 김모아 셰프가 2014년 문을 열었다. 피자나 버거를 파는 식당이나 펍 일색인 해방촌에서 보기 드문 수준급 서양 요리를 선보이는 곳이다. 밝은 하늘색 페인트를 칠한 홀은 셰프가 프랑스에 머물며 찍은 사진과 소품으로 곳곳을 장식해 가정집처럼 편안한 분위기다. 꼼모아의 주메뉴는 프랑스 조리법을 기본으로 한 유럽 음식이다. 가을 사냥 시즌에 프랑스 사람들이 사냥해서 바로 요리해 먹는 메추리를 꼼모아에서도 판다. 뒥셀(다진 양송이와 양파를 함께 볶은 것)로 속을 채우고 팬에 굽는데 그 모습이 화려하다. 푸아그라(거위간)와 오리가슴살을 층층이 쌓아 따뜻하게 데워내는 ‘푸아그라 밀푀유’는 와인 안주로도 많이 찾는다. 5월부터는 브런치 메뉴를 개시한다. 프렌치 토스트나 라자냐 같은 캐주얼하고 편안한 가정식 메뉴를 준비했다.

○ 대표 메뉴: 푸아그라 밀푀유 2만1000원, 메추리 요리 3만5000원
○ 영업시간: 오후 6시~새벽 1시, 월요일 휴무
○ 전화번호: 02-6217-5252
○ 주소: 서울 용산구 신흥로 56

반미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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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던 이나라 대표가 두 달 전 시작한 샌드위치 전문 식당이다. 식당 이름은 베트남 전통 샌드위치를 뜻하는 ‘반미’에 이 대표의 성을 조합해서 지었다. 형광빛 도는 주황색 간판과 외벽, 베트남 현지에서 공수한 인테리어 소품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세 명 정도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아일랜드 식탁도 있지만 테이크아웃 손님이 더 많다. 돼지고기·치킨·미트볼 샌드위치는 매장에서 매일 직접 굽는 바게트로 만든다.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식감이라 빵만 먹어도 맛있다. 속재료로 2~3일간 숙성한 당근과 무 피클을 넣고, 매운맛 나는 월남고추로 만든 소스를 뿌린다. 매운맛과 피클의 새콤달콤한 맛이 어우러져 담백한 빵과 조화를 이룬다. 빵이 다 떨어지면 가게 문을 닫는다. 베트남 디저트 바나나튀김과 바삭한 스프링롤 짜조 같은 한입거리 간식도 판매한다.

○ 대표 메뉴: 돼지고기·치킨 샌드위치 6000원, 바나나튀김 4000원
○ 영업시간: 오후 3시~빵이 다 팔릴 때까지. 목요일 휴무
○ 전화번호: 070-8289-4190
○ 주소: 용산구 신흥로 54

필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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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경쾌한 간판이 시선을 사로잡는 필리스는 해방촌에 1998년 문을 연 미국의 전형적인 스포츠 바다. 스포츠 바는 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면서 가볍게 식사와 맥주를 즐기는 곳을 뜻한다. 필리스 벽에는 스포츠 게임 중계용 TV 스크린이 곳곳에 설치돼 있다. 미식축구 중계가 있는 날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캐나다와 영국 출신의 사장 네 명이 공동 운영하는 이곳의 대표 메뉴는 샌드위치, 버거, 치킨 윙 같은 미국 음식이다. 기다랗게 썬 빵에 얇게 저민 고기와 치즈를 듬뿍 채운 ‘필리치즈스테이크’ 샌드위치가 특히 맛있고 배부르다. 매콤한 케이준 버거는 한국 사람들이 더 많이 찾는다. 영어로 의사소통해야 하지만, 스태프가 친절해 주문에 어려움은 없다.

○ 대표 메뉴: 필리치즈스테이크 샌드위치 7500원, 케이준치킨햄버거 6500원
○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10시, 월요일 휴무
○ 전화번호: 02-793-2548
○ 주소: 용산구 신흥로 31-1

카사블랑카

11년 전 한국에 공부하러 왔던 모로코 출신 나시리 와히드 대표가 5년 전 문을 연 모로코 샌드위치 전문점이다. 붉은색과 아이보리색으로 칠한 벽과 모로코 셰프들이 분주하게 일하는 주방에서 활기찬 분위기가 전해진다. 와히드 대표는 “북아프리카, 아랍, 남유럽과 인접해 다양한 조리법과 식재료가 공존하는 게 모로코 음식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모로코 사람들은 고기와 향신료, 빵을 즐겨 먹는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저수분으로 조리하는 타진 냄비 요리, 쿠스쿠스 쌀 요리, 샌드위치가 있다. 카사블랑카에서 파는 샌드위치는 모로코 가정에서 즐겨 먹는 가정식을 재현했다. 바게트에 모로코식 고로케나 양고기, 새우로 속을 채우고 소스와 향신료를 뿌린다. 매운맛 나는 북아프리카의 ‘하리사’ 소스와 15가지 향신료를 섞은 ‘라스 엘 하누트’ 향신료로 맛을 완성한다.

○ 대표 메뉴: 샌드위치 4000~7000원대
○ 영업시간: 오후 3시~오후 10시, 월요일 휴무
○ 전화번호: 02-797-8367
○ 주소: 용산구 신흥로 33

해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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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에서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꼭 들르는 명물 디저트 가게다. 가게 이름은 런던 외곽에 있는 도시 해크니에서 따왔다. 해크니는 예술가들이 모이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도시로 유명하다. 벽을 차분한 회색으로 바르고 격자형 창살로 포인트를 줬다. 메뉴판에는 바나나 블랙 케이크, 오캐롯 당근 케이크, 티라미수, 다크 베이비 케이크 등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디저트만 쏙쏙 골라 모았다. 가장 많이 찾는 당근 케이크는 유기농 제주도 당근에 호두와 시나몬을 넣어 고소하고 풍미가 좋다. 다크 베이비 케이크는 프랑스 초콜릿 칩과 벨기에 다크 초콜릿을 배합해 이가 시릴 정도로 단맛을 좋아하는 외국인에게 더 인기다. 여성 단골을 위한 건강 메뉴도 있다. 발효종을 넣어 저온 숙성한 빵에 메이플 시럽으로 훈연한 햄, 닭가슴살, 칠면조 등을 넣은 여러 가지 샌드위치를 판다.

○ 대표 메뉴: 당근 케이크 6500원, 다크 베이비 케이크 6500원
○ 영업시간: 오후 12시~오후 11시
○ 전화번호: 02-794-2668
○ 주소: 용산구 신흥로 34

글=이영지 기자 lee.youngji@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맛있는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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