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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대의 산소 탱크, 가장 큰 작품 주제는 생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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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호 24면

사람은 누구나 신념이 있다. 옳다고 믿는 것이 있으며, 이것이 더 나은 결과를 안겨주리라고 믿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제 아무리 큰 믿음을 안고 걸어간다 해도 장벽에 부딪히거나 끝나버린 길 위에서 방황하는 순간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그런 순간에 놓이면 우리는 대개 편한 길을 택하거나 아니면 되돌아간다.


한데 이 사람은 다르다. 도저히 길이 날 것 같지 않아도 터를 잡고 닦아가며 홀연히 걸어간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도 이 길을 따르리라 믿으며 말이다. 민병훈(47) 감독은 그런 사람이다. 소위 상업영화 감독이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을 법한 환경 영화를 꾸준히 만드는 것도, 갤러리 필름 ‘펑정지에는 펑정지에다’(12일 개봉)를 만들어 큐레이터와 함께하는 GV(관객과의 대화)를 전제로 극장 상영을 요구하는 것도 그이기에 가능한 일일 터다. 지난달 27일 서울 양재천에서 민 감독을 만나 속내를 들었다.


어제 ‘펑정지에’ 첫 시사회가 있었습니다. “일부러 대형 상영관을 피해 남산 문학의집에서 상영회를 열었는데 아주 좋았어요. 마당도 있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갤러리 필름을 감상하기에는 딱 좋은 장소였습니다. 개봉과 맞물려 메이킹 필름을 만들고 있고, 피아니스트 김선욱을 다룬 영화 ‘황제’ 후반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아, 사랑과 상처에 관한 3부작 에세이 인 뉴욕ㆍ파리ㆍ베이징도 준비하고 있어요.”


너무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거 아닌가요. 6일부터 열리는 제 13회 서울환경영화제(씨네큐브 등)에도 ‘시화공존’을 출품했잖아요. ‘감각의 경로’(2015) ‘부엉이의 눈’(2014) ‘노스텔지어’(2011) 등 4연속 본선 진출은 처음이라고 하던데. “우리가 하루에 밥 세 끼 먹는다고 헷갈리진 않잖아요. 각각의 영화는 저마다 스타일이 다르니까 각기 굴러가죠. 사실 극 영화는 굉장히 피로한 일이에요. 피 말리는 일이기도 하고. 배우를 캐스팅하고 투자를 받고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요. 그 과정에서 잘못하면 제 영혼에 생채기가 나는데 그러면 결국 제 작품에도 자해를 하는 꼴이니까요. 저도 주유를 해야죠. 영혼을 어루만지는 과정이 필요하달까요. 어떤 감독들은 술이나 여행으로 푼다는데 저는 작품으로 푸는 것 같아요. 단편 영화는 제 스스로 충전시키고 힐링하기 위해 만드는 거예요. 감각도 유지할 겸.”


단편도 장편처럼 큰 주제를 잡고 갑니까? 두려움에 대한 3부작(‘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 ‘포도나무를 베어라’)과 생명에 관한 3부작(‘터치’ ‘사랑이 이긴다’ ‘설계자’)처럼. “그럼요. 제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생명’이에요. 영화가 시대의 산소 탱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그냥 소비되고 마는 게 아니라 관객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려면 지금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이 20대에 제 개인이 투영된 관심사였다면 지금의 화두는 사랑과 상처라고 할 수 있죠. 사랑이 너무 말라 있고 아무도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모르니까요.”


그렇다면 환경에 관한 테마는 뭘까요. 모든 영화에 갈대 이미지가 등장하던데. “‘렛 잇 비’죠. 제발 좀 내버려둬라고나 할까. 파지 말고, 깎지 말고, 만지지 말고. 시화호만 해도 그래요. 애초에 바닷물을 막지 않고 그대로 뒀으면 복원할 일도 없었겠죠. 갈대는 제 트레일러예요. 갈대의 이미지가 제 모습 혹은 인간과 닮지 않았나요. 잘 흔들리지만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결코 꺾이지는 않는. 그 생명력이 제 영화 주제라고 생각해서 도입부마다 나오는 거죠.”

그 관심이 어떻게 미술로 옮겨 왔나요. “원래 미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러시아에서 영화 공부를 할 때 미학을 부전공하기도 했고, 영감을 가장 많이 받은 것도 미술이었으니까요. 아이디어나 영감도 미술ㆍ문학ㆍ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아요. 어느 날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데 ‘내가 왜 이걸 보고만 있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감독인데 이걸 찍어야지 왜 작가랑 노닥거리고만 있을까 하는. 작품이든 무대든 뒷면을 보면 훨씬 더 영감의 층위가 깊어지잖아요. 그래서 찍기 시작했죠.”


중국 화가 펑정지에(俸正杰)를 선택한 이유는. “원래 좋아하는 화가예요. 그런데 갑자기 그를 선택하게 된 건 아닙니다. 백영수 화백을 시작으로 김남표ㆍ마리 킴ㆍ김중만 등 여러 명을 찍었어요. 펑정지에가 10번째인가? 그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펑정지에까지 온 거죠.”


미술가 시리즈 열 편을 끝내고 음악으로 눈을 돌린 셈이네요. “그런가요. 거기 자꾸 집착을 하면 안 되니까요. 영역을 넓혀야죠. ‘황제’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연주를 하는 주인공이지만 실은 베토벤을 재해석하는 영화예요. 1년 정도 찍었고 지금 후반작업 중인데 음악을 자꾸 듣다 보니 그림하고는 또 다른 에너지가 있는 것 같아요.”


지난해였나요. 스크린 독과점 문제를 지적하며 ‘사랑이 이긴다’를 끝으로 한국에서 영화제작 중단을 선언했잖아요. 그건 아직 유효한가요. “네. 스크린이 2300개인데 한 영화가 1800개씩 걸리는 극장 구조가 결코 바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까요. 저는 혁명가나 투쟁가가 아니에요. 영화감독이죠. 그럼 영화를 만들어야지 자꾸 불평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아요. 여기 안에서 싸우고 함몰될 게 아니라 제가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을 토대로 길을 만드는 게 더 유효하다고 본 거죠.”


대사를 줄이고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가요.“남녀가 사랑을 하면 굳이 말을 안 해도 감정으로 다 알잖아요. 영화도 대사를 굳이 하지 않아도 이미지를 통해 정서를 전달하고 교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펑정지에와도 통역이 있긴 했지만 사실 별로 필요는 없었어요. 둘 다 말을 많이 안 해도 서로 역할을 잘 이해했거든요.”


그럼 이번 영화는 극장에서 볼 수 없는 건가요. “아닙니다. 극장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상영해야죠. 다만 미술관에 도슨트가 있는 것처럼 큐레이터가 GV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어요. 그림 작품처럼 만들었으니 길라잡이가 필요한 거죠. 저는 관객은 죄가 없다 주의예요. 볼 권리를 줘야죠. 한 분이라도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면 제가 파일을 전송하고 직접 갈 거예요. 부산이든 광주든 가서 신청자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유통구조에 문제가 있으니 직거래를 하겠다는 겁니다. ●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ㆍ민병훈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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