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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42)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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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호 1 면

예림서원김종직은 훈구 공신들에 맞서는 사림이란 신진 정치세력을 최초로 형성했다. 김종직을 배향하고 있는 예림서원. 경남 밀양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 성종 즉위 초는 공신들의 천국이었다. 성종 1년(1470) 1월 11일 한명회와 신숙주는 분경(奔競: 엽관운동) 금지령을 철폐해 달라고 요구했다. 세조는 재위 14년(1468) 3월 사실상 재상가의 분경을 허용했다. 예종은 즉위 직후 분경을 엄금해 공신들의 반발을 샀다. 사실상 원상들에게 관직 매매를 허용하는 것이어서 사헌부는 금지시켜달라고 주청했다. ? 성종은 사헌부의 청을 좇는 형식으로 다시 원상가의 분경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래갈 수 없었다. 세조 때 활성화된 겸판서는 공신들에게 행정권까지 주기 위한 것으로서 원상들이 겸판서를 맡으면 실제 판서는 허수아비가 되게 마련이었다. 예종은 즉위 다음 달 좌찬성 겸 병조 겸판서 김국광(金國光)의 겸판서 지위를 해임했다. 그러나 예종이 의문사 하자마자 대왕대비는 성종 즉위년(1469) 12월 1일 전교를 내려 겸판서 재설치를 지시했다. 무력화된 왕권은 한명회의 차지였다.


? 성종 5년(1474) 윤6월 대사헌 정괄(鄭括)은 병조판서가 이조판서의 권한인 ‘여러 도의 연변(沿邊) 수령직도 제수한다’며 병조 겸판서 한명회가 이조판서의 업무까지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생각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성종 6년(1475) 11월 18일 승정원에 익명서(匿名書)가 붙은 것이다. 승정원에선 익명서 가운데 ‘강자평(姜子平)이 진주 목사가 된 것은 대왕대비의 특명이다’라는 내용과 ‘윤사흔(尹士昕)·윤계겸(尹繼謙)·이철견(李鐵堅) 등 여러 대신들에 대한 악한 말이 쓰여 있었다’고 보고했다. 승정원은 “익명서는 국사(國事)에 관계되는 일이어도 부자 사이에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불태워버렸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성종도 “보아서 쓸데없는 것은 불태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칭찬했다. 윤사흔·윤계겸은 대비 윤씨의 동생 부자이고, 이철견의 모친은 대비의 동생이란 점에서 익명서는 대비를 겨냥한 것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익명서는 비록 국사에 관계된다 해도 옮겨 말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리고 『대명률(大明律)』에는 ‘익명서를 발견한 자는 즉시 소각하라’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익명서를 불태운 승정원의 처리는 적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익명서의 내용은 입에서 입으로 널리 전해졌다. 익명서에 거론된 우의정 윤사흔, 대사헌 윤계겸, 월성군(月城君) 이철견 등은 조정에 나와, 현상금을 내걸고 체포하자고 주장했다.


? 한명회는 여러 차례 ‘친정 불가’를 주청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상천외한 논리까지 등장했다. 권력이 극도에 달하다 보니 군신 사이의 분별마저 사라진 것이었다. 성종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일 의정부에 전지를 내려 자신이 여러 번 사양했음을 상기시킨 후 정권을 받겠다고 말했다. 성종의 결단에 다들 놀랐다. 대비가 물러나겠다고 한 그날 정권을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성종 친정 시대의 개막이었다. 다음 날부터 한명회에 대한 대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성종의 친정을 반대한 행위를 국문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국문 요청을 거부하고 한명회에게 음식을 내렸다. 한명회는 무사했지만 이제 권력은 자신의 손을 떠나 성종에게로 돌아가고 있음을 절감해야 했다. 공신들은 속속 관(棺)으로 들어갔다. 한명회와 정창손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신들이 죽은 것이다. 그 공백을 성종은 자신의 왕권과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메우려 했다. 바로 신진 사림이었다.

이목 사당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 있다. 김종직의 문인인 이목은 성종 때 사림의 선봉장이었으나 연산군 때 사형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성종 6년(1475) 11월 승정원에 붙은 익명의 벽서 사건으로 이듬해 초 대왕대비 윤씨가 물러나고 성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왕권은 아직 미약했다. 공신 집단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경제력도 막강했다. 세조가 공신들에게 준 대납권(代納權: 세금을 대신 납부해주고 두 배 이상을 받는 권리)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만들었다. 어떠한 불법을 범해도 처벌 받지 않는 면죄부까지 갖고 있는 공신들은 공신전(功臣田), 별사전(別賜田: 공신에게 내려준 토지), 과전(科田: 관원에게 내려준 토지) 등에서 규정 이상의 막대한 전세(田稅)를 받아 치부했다.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질 수밖에 없었고 많은 물의가 일었다. 급기야 세금 담당부서인 호조에서는 성종 6년(1475) 11월 사헌부에 이를 막을 수사권을 주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불법으로 더 많은 전세를 빼앗긴 백성들은 사헌부에 고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신들을 상대로 시골 백성이 서울의 사헌부까지 올라와 고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성종은 이 문제를 원상에게 의논하라고 시켰다. 원상 한명회·정창손은 그런 사례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윤계겸은 그러나 같은 상소에서 의정부 서사제(署事制)의 부활도 요구했다. 원상제 폐지와 맞바꾸자는 절충안이었다. 의정부 서사제는 의정부에서 집행부서인 육조(六曹)의 보고를 받아 먼저 심사하고 국왕에게 보고하는 반면 그때까지 시행하던 육조(六曹) 직계제는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제였다. 의정부 서사제는 의정부 정승들이 육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였다. 원상들은 성종이 원상제를 폐지하는 대신 의정부 서사제를 부활시키는 절충안을 택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성종의 생각은 달랐다. 의정부 서사제는 부활시키지 않고 원상제만 폐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성종이 허수아비 왕 노릇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성종은 아직 왕권이 공신들과 맞설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성종은 훈구 공신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신진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위 9년(1478) 설치한 기관이 홍문관(弘文館)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홍문관이 궁중의 서적을 관리하고 문한(文翰)을 처리하며, 국왕의 자문 기능을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사실상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의 부활이었다.? 홍문관은 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삼사(三司)로 불렸는데, 탄핵권과 언론권을 갖고 있는 언관(言官)이었다. 성종은 재야 사림(士林) 출신의 과거급제자들을 주로 삼사에 배치해 공신들을 견제했다. 성종 무렵 사림은 훈구 공신에 반대하는 신진 정치세력을 뜻하는 정치적 용어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정치적 사림의 선구 격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다. 김종직은 사림의 초대 당수였다. 사림이 훈구 공신들과 대립한 것은 순수한 학문적 세계관의 발로만은 아니었다. 양자는 토지를 두고 격렬하게 충돌했다. 사림들은 지방에 상당한 규모의 토지와 노비를 갖고 있는 재지사족(在地士族)이었는데 훈구 세력이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양자가 충돌했던 것이다. 사림들은 성리학의 대의(大義)와 의리(義理) 같은 명분론을 중시했다.?

선릉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 성종 12년(1481)에는 압구정(鴨鷗亭) 사건이 발생했다. 그 해 6월 24일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는 성종에게 “명나라 사신이 신의 압구정을 보려고 하는데 정자가 매우 좁으니 만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고 성종은 승지를 사신에게 보내 “압구정은 좁아서 유관(遊觀)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명 사신은 “압구정이 비록 좁더라도 가보겠다”라고 우겼다. 세조가 쿠데타를 추인받기 위해 명에 저자세 외교를 하고 난 후 명 사신의 위세는 더욱 커졌던 것이다. 공신 집단은 명 사신에게 뇌물을 바쳤는데 심지어 한명회는 명 황제에게도 뇌물을 바쳤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였다. ? 이때 가뭄에 우박이 겹쳐 조정은 그 대책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성종은 기우제를 지내고 사면령을 논의하는 한편 명 사신 접대를 위해 경복궁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풀거나 소주(燒酒)와 어육(魚肉)을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太平館)으로 보내야 했다. 한명회는 압구정이 좁아서 잔치할 수 없다고 말한 다음날인 6월 25일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명회가 아침에 명 사신을 찾아갔더니 자꾸 권유해 주반(晝飯: 점심)을 함께했다면서 압구정 잔치에 대해 다시 언급했다. 명 사신이 안 가겠다는 것을 자신이 권유해 오도록 했다는 말이다. 성종은 하지 않아도 될 잔치를 하게 만든 한명회에게 화가 나서 압구정이 아닌 제천정에서 치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명회는 성종의 전교를 무시하고 왕실의 보첨만(처마를 잇대는 장막)을 내려 달라고 다시 요청했다. 성종은 명 사신들이 이미 아는 제천정에서 잔치를 치르겠다고 덧붙였다. 성종의 결정에 반발한 한명회는 자제를 보내서 항의했다. 압구정이 아닌 잔치에는 가지 않겠다는 항변이었다. ? 7월 1일 사헌부에서 한명회의 죄상을 보고하자 성종은 의정부의 견해를 물으라고 말했다. 비록 부처는 면했지만 한명회의 시대가 서서히 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그러자 적개 1등공신이자 좌리 4등공신인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이 공신 집단의 대표로 부상했다.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인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尹壕)가 윤필상의 당숙(堂叔)이므로 국왕의 인척이기도 했다. 성종 23년 12월 이목(李穆) 등 성균관 유생들이 윤필상 공격에 나섰다. 모후 인수대비가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완화할 것을 요구했는데 윤필상 등이 동조한 것이 원인이었다. 성종은 화를 내면서 “수상은 내가 존경하는 바이니 간사한 귀신이라는 정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해서 말하라”고 꾸짖었다. ? 이 무렵 사림은 구체적인 증거보다는 유학에 비추어 간신이라는 식으로 대신들을 공격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성종은 이목 등 8명을 옥에 가두었다가 이목을 제외하고 석방했으나 언로(言路)가 막힌다는 대간의 간쟁이 잇따르면서 이목도 석방시켰다. 성종은 훈구와 사림 중 어느 한쪽을 붕괴시킬 생각은 없었다. 성종이 보기에 훈구세력은 나라를 운영할 능력이 있는 반면 사림은 일체의 부정을 용납 않는 도덕성이 있었다. 성종은 양자를 적절히 활용해 왕권을 강화했다. 양자의 이런 역학관계를 이용하는 것이 왕권 강화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연산군이 즉위한 후 공신들이 사림을 공격한 것이 사화(士禍)다. 그 과정에서 이목과 이심원이 사형당한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54호 2010년 2월 20일, 제155호 2010년 2월 28일, 제156호 2010년 3월 7일, 제157호 2010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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