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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60에 파리 데뷔전 … 현지언론 "테러 맞선 시민들 연상” 호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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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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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정현이 파리 데뷔 개인전 ‘서 있는 사람’이 열리고 있는 ‘팔레 루아얄 정원’에서 침목으로 만든 대형 인간형상 앞에 섰다. [사진 정현]

30년 전 유학했던 프랑스 파리 미술계에 나이 60이 돼서야 데뷔한 조각가는 담담했다. 정현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는 “5년 전쯤이었다면 흥분했겠지만 지금은 평온한 마음속에서 ‘찾아주니 고맙다’는 한마디가 떠오르더라”고 했다. 파리의 명소인 ‘팔레 루아얄 정원’에서 지난달 30일 개막한 정 교수의 대형 야외 조각전 ‘서 있는 사람(L’Homme Debout)’은 파리지앵의 큰 관심 속에 하루 평균 2000여 명의 관람객을 모으고 있다.

정현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폐침목 소재 ‘서 있는 사람’ 조각전
관람객 하루 2000명, 전시 3개월 연장

‘서 있는 사람’은 수명을 다한 침목(枕木)을 소재로 한 인간 군상이다. 철로 위에 제 몸을 누이고 육중한 기차의 무게를 견디며 거친 비바람을 맞아온 침목들이 50여 명 인간으로 우뚝 섰다. 해묵은 나무숲으로 환생해 돌아온 침목은 많은 얘기를 들려준다. 정 교수는 오랜 세월 묵묵히 제 일을 견뎌내고 임무를 완수하고 난 낡은 것 속에서 삶의 진실을 본다.

“저는 조각의 본질을 힘으로 파악합니다. 하찮은 것에서 발견하는 신선함, 날것에서 나오는 생명력, 예측을 불허하는 이미지, 느닷없음, 비탄으로부터의 해방, 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헤맴의 깊이 같은 것이지요.”

이런 조각가의 마음이 통했을까. 프랑스 언론들은 “‘서 있는 사람’에서 최근 파리와 브뤼셀에서 터졌던 폭탄 테러에 맞서 일어섰던 시민들의 연대를 보았다”고 해설했다.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전이기도 한 이번 조각전에 대해 아녜스 배나이에(51) 프랑스 측 예술감독은 “우리 문명을 파괴하려는 야만 세력에 저항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이런 호평에 힘입어 6월 12일까지였던 전시기간이 9월 말까지로 3개월 여 연장됐다. 이달 초 열린 ‘아트 파리 아트 페어’에서도 주목받았다. 침목을 비롯해 아스콘(아스팔트 콘크리트), 콜타르, 파쇄공 등 산업폐기물을 재료로 쓰는 그는 “강하고 무겁고 소박한 물질에 누적된 인고의 힘을 밖으로 드러낼 뿐”이라 했다. 그 공력을 인정받아 국립현대미술관 ‘2006 올해의 작가’에 선정됐고 2014년엔 김세중 조각상 본상을 받았다.

정 교수는 6월에 파주출판단지에 작업실을 내고 새 작품 구상에 들어간다. 철거된 고가도로 상판이나 콘크리트 기둥 뼈대를 뚝뚝 잘라 쟁여놓고 싶은 마음도 있고, 산불로 시커멓게 탄 나무 밑둥치를 잘라다 새 생명을 불어넣을 계획도 세웠다. 60세 신인의 자세로 돌아간 그는 “주장하기보다 성찰하는 인간형상으로 우리가 어디서 왔나, 우리는 누구인가, 물어보는 조각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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