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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힘으로 왕이 된 성종, 문(文) ? 무(武) 갖춘 새로운 조선 꿈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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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호 1 면

2017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한국사가 필수 과목이 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중앙SUNDAY는 과거 연재했던 인기 역사 기획 내용을 토대로 이와 관련한 한국사 교과서 내용을 분석하고, 실전 예상 문제까지 풀어보는 새로운 형식의 NIE(Newspaper in Education)를 게재하고 있습니다.

주제별로 현행 8종의 교과서 내용을 비교해 표로 정리해주는 이 역사 콘텐트는 시험을 준비하는 중·고교생뿐 아니라 역사에 관심 있는 성인 독자에게도 유익한 내용입니다. 중앙SUNDAY 홈페이지를 통해 매주 게재되는 역사 NIE를 통해 한국사와 좀 더 가까이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총평】


? 조선은 건국 초부터 군역 제도를 정비했다. 태종 이후에는 사병이 모두 폐지되었고,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양인 남자는 군역의 의무를 지게 하는 양인개병제를 시행했다. 이로써 모든 양인은 현역으로 일정 기간 교대로 복무하는 정군이 되거나 정군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보인이 되었다. 국역을 지고 있던 현직 관료와 향리는 군역을 면제 받았고, 성균관과 향교의 학생들도 군역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종친과 외척, 공신이나 고급 관료의 자제들은 고급 특수군에 편입되었다.


? 중앙군은 궁궐과 수도를 수비하는 5위로 이루어졌는데, 정군을 중심으로 직업 군인인 갑사나 특수병으로 구성되었다. 지방군은 건국 초기에 국방상의 요지인 영이나 진에 소속되어 복무하였으므로 영진군으로 불렸는데, 각 도마다 육군 부대인 병영과 수군 부대인 수영으로 구성되었다. 병영은 병마절도사가, 수영은 수군절도사가 지휘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국경과 해안의 중요한 곳에만 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그곳이 무너지면 내륙을 방어할 수 없는 위험이 있다고 하여, 세조 때부터 전국의 중 고을마다 진관을 설치하고 수령이 군사권을 쥐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지방 행정 제도]병영은 8도에 고루 분포하지만 수영은 남해안에 집중되어 있었다.(비상교육 한국사 p. 104)
? 세조 이후 시행된 진관 체제는 각 도에 한 두 개의 병영과 수영을 두고, 병영에는 병마절도사를 파견하고, 수영에는 수군절도사를 파견하여 지휘하게 한 것이다. 주요 요충지에 거진을 두어 그 지역 군대를 통제하고, 지역 방위를 담당하도록 했다. 진관 체제 하에서는 요충지에 고을에 성을 쌓아 주둔하면서 방어 체제를 강화해나갔다.


? 조선 초에는 서리, 잡학인, 신량역천인 등으로 구성된 잡색군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예비군에 해당되었다. 양인개병(良人皆兵)의 원칙에 따라 군역 의무가 없었던 노비도 잡색군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농민은 정규군으로 편성되고 잡색군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 군사 조직과 함께 교통.통신 체제도 정비되었다. 이 시기에는 위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봉수제가 정비되었다. 봉수제는 국경 지대의 군사적 위급 사태를 중앙에 신속히 알리기 위한 제도이다. 한양의 목멱산(남산)에 이르는 봉수로가 정비되고 봉수대가 설치되었다. 산꼭대기에 연기와 불을 피웠는데, 위급 상황의 정도에 따라 1~5개의 봉수를 올렸다.


? 물자 소송과 공문 전달을 위한 역참도 설치되었다. 역참 설치로 인하여 중앙 집권적 행정 운영이 더욱 쉬워졌다. 역참은 전국의 주요 도로에 500여 개가 설치되었다. 역(驛)이란 당시의 교통수단인 말을 탈 수 있는 곳이다. 역참에는 역마를 두고 관청의 공문 전달과 공물 수송을 담당하게 하였다. 역참은 교통의 요지에 30리마다 설치되었는데, 마패를 보여주고 말을 이용할 수 있었다.?

[봉수대]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을 이용하여 변방의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달하는 통신 수단사진은 서울 남산에 있는 복원 보형 (금성출판사 한국사, p. 150)

? 조선초기에는 중앙 집권이 강화되면서 각종 지도와 각종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통치 자료로 활용했다. 지방 통치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고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지리에 대한 연구와 지도 편찬 사업도 활발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일본 류고쿠 대학 도서관 (지학사 한국사, p. 138)

? 태종 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가 제작되었으며, 세종 때에는 전국 지도인 '팔도도'를 만들었다. 세조 때 완성한 '동국지도'는 인지의 등 과학 기구를 이용하여 만든 최초의 실측 지도이다. 16세기에 만든 지도 가운데 '조선방역지도'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지리지 편찬도 추진되어 세종 때는 “심찬팔도지리지”, 성종 때에는 “팔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를 참고하여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다. 중종 때 “동국여지승람”을 보충하여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 동국여지승람은 각 군현의 위치와 역사, 지세, 면적, 인구, 인물, 풍속, 특산물, 교통 등을 자세히 수록했다. 이는 당시 국토에 대한 인문 지리적 지식 수준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 국가적 차원에서 민족 문화를 정리하는 저술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성종 때 서거정이 삼국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시와 산문 가운데 뛰어난 것을 골라 “동문선”을 편찬한 것이 대표적이다. 동문선의 서문에는 “우리나라의 글은 송.원.한.당의 글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글일 따름이다.”라고 하여 우리나라의 한문학이 중국과는 다른 독자성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서거정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동국통감”을 편찬했다.


? 고려 말부터 유행한 설화 문학도 조선 시대에 계속되었다. 서거정이 국왕과 관료들의 언행이나 민속 풍속을 모아 펴낸 “필원잡기”, 성현이 민속이나 문학에 대한 글을 모아 펴낸 “용재총화” 등이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 어숙권의 “패관잡기” 등과 같은 작품 처럼, 일정한 격식 없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기록한 작품을 패설이라고 한다.


? 사림들은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지내고, 향약을 통해 백성에게도 성리학적 윤리를 전파하여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했다. 향사례는 지방 수령이 손님을 초청하여 활쏘기 행사 등 연회를 베풀면서 향촌민에게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는 의례이다. 향음주례는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모시고 음수를 통해 예법을 익히는 의례이다.


?조선에서 양반이 지배층으로 자리잡으면서 양반의 취향이나 가치관이 반영된 문화가 나타났다. 조선 전기의 문화를 이끌고 문학과 예술을 향유한 계층은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였다. 이 때문에 이 시기 문학과 예술에는 양반들의 취향과 관념이 잘 반영되어 있다.


? 향촌 선비들의 활약으로 문학 활동이 지방까지 확산되어 학습 교재인 “훈몽자회”가 편찬되었으며, 옛말 사전인 “대동운부군옥”도 편찬되었다.


? 16세기에는 부국강병을 반대하고 왕도 정치를 추구하는 사림의 의식을 반영하는 양반 문화가 발달했다. 이러한 양반 문화는 문학과 예술에 반영되었다. 사림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사림 문학이 주류가 되어 한시, 가사, 시조 분야에서 뛰어난 작가들이 배출되었다.


? 조선시대에는 한시 등 양반 중심의 한문학이 주로 발달하였으나, 한글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시조나 가사 문학 등도 발달하여 문학의 내용과 형식이 다양해졌다.


?김시습은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어 민중의 생활 감정과 역사 비판 의식을 담았다. 고려말부터 이어져 온 시조는 16세기에 들어 황진이, 윤선도 등이 활약하면서 인간 본연의 감정을 드러낸 작품이 많이 나왔다. 윤선도는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를 통해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여유로움을 표현했다. 조선에서 새롭게 발전한 가사 문학에서는 송순, 정철 등이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정철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가사를 지어 국문학의 새 경지를 열었다. 또한 황진이, 허난설헌 등 여류 작가들도 배출되었다.


? 관료와 사림을 비판한 방외인 문학도 나타났다. 방외인은 사회 질서 밖에서 방랑하면서 기이한 행적을 남겼고, 대개 도가의 선술(仙術)이나 민간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체제 비판적인 시나 소설을 즐겨 썼다. 15세기말 김시습으로부터 시작된 방외인 문학은 16세기 들어와 임제, 어숙권 등이 활약하면서 사회 비판적 성격이 더욱 커졌다.


? 조선 왕조와 사대부들은 음악을 중요시하였다. 음악은 국가 의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음악을 백성을 교화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예(禮)와 악(樂)의 정비는 곧 모든 질서의 안정을 의미한다고 본다. 예는 각자 신분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지켜야 할 도리이며, 악은 예에 의한 질서가 이루어지도록 사람의 마음을 순화하는 작용을 한다고 보았다. 이에 악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성종 때 성현은 “악학궤범”을 편찬하여 음악의 원리와 역사, 악기, 무용, 의상, 소도구까지 정리했다.


? 16세기 중반부터는 당악과 향악을 속악으로 발달시켜 민간에서도 가사, 시조, 가곡 등 우리말로 된 노래를 연주했다.


【핵심 키워드】


☞ 세조 이후 [진관 체제]가 시행되었다. 조선 초에는 서리, 잡학인, 신량역천인 등으로 구성된 [잡색군]이 있었다. 위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봉수제]가 정비되었다. 물자 소송과 공문 전달을 위한 [역참]도 설치되었다. 성종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각 군현의 위치와 역사, 지세, 면적, 인구, 인물, 풍속, 특산물, 교통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성종 때 [서거정]이 삼국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시와 산문 가운데 뛰어난 것을 골라 [동문선]을 편찬했다. 또한 서거정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동국통감]을 편찬했다. 서거정은 국왕과 관료들의 언행이나 민속 풍속을 모아 [필원잡기]를 펴내었다. 김시습은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어 민중의 생활 감정과 역사 비판 의식을 담았다. 성종 때 성현은 [악학궤범]을 편찬하여 음악의 원리와 역사, 악기, 무용, 의상, 소도구까지 정리했다.


? 사림들은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지내고, [향약]을 통해 백성에게도 성리학적 윤리를 전파하여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했다. ☜


【예상 문제 및 해설】


1. 밑줄 친 ‘왕’의 재위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진주의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왕은 엄벌에 앞서 백성에게 널리 표행의 풍습을 알릴 수 있는 서적의 편찬을 명하였다. 이에 직제학 설순 등이 삼강(三綱)의 도리를 실천한 충신, 효자, 열녀의 모범적인 행실을 모아 그 행적을 그림과 함께 간행하였다.
① ?전국 지도인 팔도도를 제작하였다.


② ?금속 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하였다.


③ ?농민의 경험을 바탕으로 농사직설을 간행하였다.


④ ?백성들의 문자 생활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⑤ ?한양을 기준으로 역법을 계산한 칠정산을 편찬하였다.

* 2013년 7월 학력평가 19번

해설 : 정답? ②

②? 금속 활자는 고려시대에 개발되었다. 상정고금예문(1234)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며, 직지심체요절은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다.


2.?(가) 국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조선은 개국 후에도 여전히 고려 때 사용하였던 중국의 역법을 썼으나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점이 있었다. (가)이/가 즉위한 후 정인지, 정초 등에게 명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도록 하고, 수시력과 회회력을 자세히 살펴 우리의 실정에 맞게 바로 잡아 “칠정산 내편”과 “칠정산 외편”을 만들게 하였다.
①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②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③ ?“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하였다.


④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돌에 새겼다.


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다.⑤

* 2013년 3월 학력평가 5번

?

해설 : 정답 ①

<오답 풀이>

② 경국대전은 세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했다.

③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은 고려 시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되었다.

④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은 태조 이성계 때의 일이다.

⑤ 현존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태종 때 만들어졌다.

?


3.?연표의 (가) 시기에 (나)와 같은 주장을 한 정치 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나) 중국 한나라의 현량과 제도를 따라 어진 이를 천거하여 등용해야 합니다. 비록 한 두 사람이 천거에 빠진다 하더라도 주저할 것이 없이 시행해야 합니다. 공론(公論)이 없는 때라면 그만이겠지만 공론이 있으니 좋은 일을 폐지해서야 되겠습니까?
①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층이었다.


②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였다.


③ 소격서 폐지와 소학 보급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④ 중앙의 권력을 바탕으로 향촌 사회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⑤ 관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여 문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 2007학년도 9월 모의평가 17번


* 21회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① 연산군” 편 문제 9

해설 : 정답 ③

③ 사림은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이고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했다. 그들은 도교 행사를 주관하는 소격서 폐지와 유교적 도덕을 보급하기 위한 소학 보급에 노력했다.


4. 다음 대화의 (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향촌 주민들이 조직한 공동 노동 조직이었다.


② 매향 활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신앙 조직이었다.


③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기 위해 만든 기구였다.


④ 선현의 덕행을 추모하고 학문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였다.


⑤ 유교 윤리를 기반으로 향촌의 공동 조직을 재구성한 것이다.


* 2010학년도 수능 13번


* 23회 “국란을 겪은 임금들 ① 인조 2” 편 문제 2

해설 : 정답 ⑤

⑤ 향약은 유교 윤리를 기반으로 향촌의 질서 유지와 상부상조를 위해 마련된 규약이다.


5. 다음 대화에서 (가)에 들어갈 계층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한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보기]


ㄱ. 신분적으로 양인에 속하였다.


ㄴ. 법제적으로 문과 응시가 금지되었다.


ㄷ. 조운이나 형사 업무에 종사하는 부류도 있었다.


ㄹ. 이들에 대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장례원을 두었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 2013학년도 6월 모의평가 5번

* 28회 “삼종(三宗)의 혈맥 ① 숙종 1” 편 문제 2

해설 : 정답 ②

ㄱ. 신량역천은 신분적으로 양인에 속하나, 하는 일은 누구나 기피하는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 ㄴ. 역졸과 봉수군뿐만 아니라 염간, 해척, 사기간, 철간, 조졸, 나장 등이 신량역천에 포함


6. (가)의 설치 배경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가)에서 매달 급료를 지급할 때 사헌부에서 감동을 하지 않아 많은 곡식이 낭비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사헌부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소서.


? (가)에는 포수가 좌?우로 한 부대씩 있고, 살수는 좌?우로 두 부대씩 있으며, 사수가 그 사이에 한 부대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적과 거리가 멀 때는 조총으로 제압하고, 다음은 활로, 그 다음은 창과 칼로 제압하면 여러 가지 병기가 갖추어져 군사들이 마음이 든든해질 것입니다.


① 속오군이 양반의 회피로 인해 유명무실해졌다.


② 북벌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군사력이 필요했다.


③ 왜군과 싸우는 데 효과적인 군대 편제가 모색되었다.


④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유사시 동원할 부대가 필요했다.


⑤ 진관 체제의 복구를 위해 지방군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 2010학년도 9월 모의평가 13번

* 28회 “삼종(三宗)의 혈맥 ① 숙종 1” 편 문제 8


?

해설 : 정답 ③

제시된 자료는 훈련도감에 대한 내용이다.

③ 왜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인 편제와 군사 훈련 방식을 모색한 결과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훈련도감은 삼수병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일정한 급료를 받는 직업 군인의 성격을 지녔다.


7.?강화도 일원의 주요 유적지를 나타낸 지도이다. 표시된 곳들을 답사하기 위해 사전에 학습해야 할 역사적 사실로 적절한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보기]


ㄱ. ? ?A ?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애니미즘


ㄴ. ? ?B ? 고려 시대 몽고의 침입과 무씨 무신 정권의 대응


ㄷ. ? ?C ? 조선 시대 왕조실록의 편찬 및 보관


ㄹ. ? ?D ? 삼국 시대 천문 관측 기술의 발전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 2005학년도 6월 모의평가 12번

* 22회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② 광해군” 편 문제 3

?


?

해설 : 정답 ③

ㄴ. 몽골은 자국 사신이 피살된 사건을 구실로 대군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다(1231).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강화도로 도읍 옮기고 장기 항전 위한 방비를 강화했다.

ㄷ. 조선왕조 건국 이후 실록 편찬 사업과 함께 춘추관의 내사고 외에 지방에도 외사고를 설치했다. 충주, 전주, 성주의 외사고 3곳을 두었는데, 춘추관의 실록각과 합쳐 4사고라 한다. 임진왜란 거치며 전주 이외의 사고가 모두 소실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사고의 위치를 조정했다. 그리하여 강화도,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에 외사고 4곳이 설치되어 5사고 체제를 갖추었다. 강화 사고는 본래 부내(府內)의 봉선전 서쪽에 있다가 1606년 마니산으로 옮겨 신설되었고, 1660년(현종 1년)에는 다시 정족산성의 사고를 새로 마련했다.

<오답 풀이>

ㄱ.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다.

ㄹ. 참성단은 국조(國祖)인 단군에게 제사를 거행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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