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현석동(玄石洞). 한강변을 끼고 밤섬을 마주보고 있는 이곳 지명의 유래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한 인물과 관련이 있다. 좌의정을 역임했으며 숙종의 묘정과 문묘에 모두 배향된 당대의 유학자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여기에 살았다는 것이다. 박세채는 노년에 이 동네에 소동루(小東樓)를 짓고 집필을 하며 지냈는데, 한강 위로 나는 갈매기와 황포 돛배를 바라보고자 늘 강 쪽으로 난 창문을 열어두었다고 전해진다.
이조판서 사직하며 ‘시무12조’ 올린 박세채 ... 가치기준 확립 중요성 강조
박세채가 재상을 지냈기 때문에 흔히 관직 활동을 활발하게 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유배와 재야생활을 거듭하느라 실제로 조정에 머문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더욱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정쟁과 혼탁한 국정 운영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그는 자신이 속한 당파인 서인이 집권하고 있었을 때조차 번번이 사직상소를 올리며 조정에서 물러나곤 했다. 이번 호에서 소개하는 상소도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조판서를 사직하면서 ‘시무12조’를 함께 올렸다. 자신의 정책이념을 개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임금과 조정에 보내는 압박성격이 짙었다. 이런 정치가 실현되지 않으면 자신은 떠나겠다는 것이었다(이하 인용은 모두 [숙종보궐실록] 14년 6월 14일의 실록 기사가 출처임).
우선 박세채가 제시한 12개조 항목을 정리해보면 ①큰 뜻을 세우고 분발할 것 ②성학(聖學)에 힘쓸 것 ③내정(內政)을 바르게 다스릴 것 ④규모(規模)를 세울 것 ⑤기강을 확립할 것 ⑥어진 인재를 구할 것 ⑦언로를 열 것 ⑧법과 제도를 정비할 것 ⑨법전을 찬술할 것 ⑩선왕의 정치를 본받을 것 ⑪군정을 정돈할 것 ⑫수어(守禦, 국방)에 마음을 쏟을 것이다.
그는 각각의 항목별로 구체적인 정책과 세부 실천방안을 설명했다. 예컨대 3항의 경우 내수사(內需司)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목된다. 내수사란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임금은 이곳을 통해 신하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자금을 사용했다. 이는 국가재정 운영의 투명성을 저해할 뿐 아니라 왕은 철저하게 공적(公的)이어야 한다는 유교적 가치관에 어긋난다. 박세채는 내수사의 혁파를 통해 왕의 공공성을 더욱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자신의 당파 집권 때도 번번히 사직
또한 박세채는 6항에서 서열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며 임기를 늘려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고 했고, 8항에서는 비변사로 인해 유명무실해져 있던 의정부의 제기능을 회복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기구일 뿐인 비변사를 없애고 왕-재상-6조로 이어지는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재건해 현명한 사대부가 정치를 담당하는 유교적 이상을 실현시키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법전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당시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은 편찬한 지 200년이 지나 여러 가지 한계를 노출하고 있었다. 이에 박세채는 달라진 시대환경을 반영해 법을 재정비, [속대전(續大典)]을 편찬하자고 주장했다. 훗날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11항, 12항도 흥미롭다. 박세채는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나아가서는 적을 물리치고 지킬 때는 적이 감히 넘보지 못할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며 군제를 정비하고 군마와 군량을 풍족하게 비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예 상비군을 육성하고 다양한 전장상황을 대입한 훈련을 통해 실효성 있는 전술을 세워야 한다고도 말했다. 병기 또한 더욱 정교하게 개량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를 토대로 박세채는 북쪽 국경에는 산성을 수축하고, 평상시에는 재상급 대신이, 유사시에는 임금이 직접 통솔하는 지휘사령부를 설치하며 남쪽 해안은 둔전과 섬 개발, 전함 건조를 통해 수전(守戰) 역량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군사와 안보에 대한 깊은 식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행정적인 것으로, 정책의 성공적인 구현을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1항, 2항, 4항, 5항이다. 박세채는 이 네 항목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이 중 1항 ‘큰 뜻을 세우고 분발하라’는 것은 국가경영의 올바른 비전을 확립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세채는 환국(換局) 등 당시의 극단적인 정쟁과 정국 혼란이 정치의 방향성이 없는 데서 기인해고 진단한다. 그는 “평범한 사람도 반드시 뜻을 세워야 분발할 수 있고, 분발해야 성취를 거두는 법”이라며 임금은 먼저 왕도(王道)와 대의(大義)에 입각한 큰 뜻을 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 자연스레 그 뜻을 향한 절실한 마음이 생기고 치열한 노력도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2항에서 강조한 임금의 학문은 이 과정에서 병행돼야 할 끊임없는 자기성숙과 혁신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4항 ‘규모를 세우라’는 것은 가치기준을 정하라는 의미이다. 박세채는 “군주가 국가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일정한 규모를 두어 편벽된 것을 구제하고 중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에게 가치관과 삶의 철칙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선택을 하는 기준이 되듯이, 왕이나 국가에게도 결정을 하고 판단을 내리기 위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실리에 집중할 것인가 명분에 집중할 것인가. 성장을 우선할 것인가 분배를 우선할 것인가. 맞서 싸울 것인가 물러나 지킬 것인가. 물론 외부 환경과 국가의 상황에 따라서 결정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런 판단을 내릴 때 기준이 확고해야 어긋나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공정한 상벌, 붕당 타파 주장
마지막 5항 ‘기강을 확립하라’도 중요하다. 기강은 공동체의 질서를 안정적으로 구축하고 목표를 향해 역량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기강을 세우지 못해 법과 원칙이 흔들리고 편법과 부정이 만연하는 공동체는 신뢰자본을 상실하고, 나아가 존립마저 위협받게 된다. 기강은 이를 미연에 방지하는 치료제인 것이다. 박세채는 기강의 확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벌을 공정하게 하고” “어질고 사특한 것을 분별하며” “붕당을 타파하고”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벌이 엄격하게 적용되면 자연스레 착한 일이 권장되고 나쁜 일은 억제된다. 어질고 사특한 것을 분별하면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고 소인배를 물리칠 수가 있다. 붕당을 타파하면 지나친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국가 에너지의 손실을 막을 수 있으며, 차별을 없애면 국가의 모든 역량이 낭비되지 않고 집약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기강은 국가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핵심 동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의 논의를 통해 박세채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성과를 바라기 이전에 먼저 큰 뜻부터 세우고 분명한 가치기준을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공정하게, 온 힘을 다해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는 국가경영이나 자기경영이나 다르지 않다. 결국 인간의 의지와 자세에 달려있다는 것. 박세채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