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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2조원 대학 지원, '독이 든 성배' 되면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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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학들은 늘 배고파합니다. 정부의 고등교육기관 지원 예산은 국내총생산(GDP)의 0.8%에 불과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1.2%에 턱 없이 못 미치는 수준이죠. 0.8%는 그나마 국가 장학금을 늘려준 덕에 높아진 겁니다. 3년 전만 해도 0.4~0.5% 수준을 오락가락했지요. 초·중등 교육의 정부 부담 비율은 3.2%로 고등교육의 네 배 정도 됩니다. 사실상 민간이 고등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셈입니다.

대학들은 곳간이 비었다고 난리입니다. 한때는 등록금을 연간 최고 10% 이상 올리는 ‘난폭 운영’을 하다 2012년부터 철퇴를 맞았습니다. 교육부가 등록금 인상을 억제하고 정치권의 반값등록금 공약이 불거지면서 등록금이 동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5년째 등록금을 올린 대학은 거의 없습니다.

2011년 사립대 기준으로 연간 769만원이던 등록금이 지난해는 734만원이 됐으니 대학 입장에선 물가 상승률 등을 감안하면 힘든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정부의 각종 대학재정지원사업에 목을 맵니다. 한 푼이라도 더 끌어다 팍팍한 살림에 보태려는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이건 정도(正道)가 아닙니다. 교육부에 질질 끌려 다니며 ‘독이 든 성배’만 탐내며 굽실거립니다. 지성의 자존감이 땅속으로 꺼져버렸습니다. 그럼 교육부가 무슨 사업으로 대학을 쥐락펴락 하는지 볼까요.

◇프라임·링크·에이스·CK···현란한 미끼에 홀려 대학들 이전투구 
교육부의 대학재정 지원 사업은 명칭부터 현란합니다. 프라임(PRIME), 링크(LINK), 에이스(ACE), CK-1, CK-2 , BK21+ ···. 낚시꾼(교육부)은 화장품 브랜드 같은 현란한 미끼를 끼워 대학의 바다에 던집니다. 루어(LURE)에 홀린 물고기(대학)들은 치고 받으며 난리를 칩니다.

교육부가 던지는 미끼가 올해만 2조원이 넘습니다. 여기다 산업부나 기재부, 미래부 등 정부의 각종 연구 사업비를 합하면 8조원이 넘습니다. 배고픈 물고기들이 달려들 수밖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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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인위적 개입으로 시장이 교란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대학(전문대 포함)의 입학정원은 53만 명인데 고교 졸업자는 2018년 55만 명, 2023년에는 40만 명 대로 줄어듭니다. 그런데 10년 뒤 산업계의 수요는 공학 계열이 21만5000명이 부족하고, 인문·사회계열은 31만8000명이 넘친다는 게 정부의 예측입니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공학계열 확대를 골자로 한 대학 구조조정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김도연 울산대 총장은 예측이 잘못됐다고 지적합니다. 현재도 연간 14만~15만 명이 공대를 졸업하는데 더 늘리면 공대 졸업자들이 용접과 판금까지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예컨대 프랑스는 공대생 졸업자가 연간 10만 명, 일본은 17만 명이랍니다. 그런데 산업규모는 프랑스가 우리의 두 배, 일본은 3~4배나 큽니다. 이게 뭘 의미합니까. 공대를 더 늘려봤자 공고나 전문대 졸업자들의 일자리만 잠식할 뿐이라는 게 김 총장의 분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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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이래 최대 사업 프라임···약발보다 후유증 더 우려돼
그러면 대학들이 사활을 건 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 사업, 이른바 프라임(PRIME: PRogram for Industrial needs-Matched Education) 사업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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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학에 올해만 최대 300억원을 지원해 단군 이래 최대 사업으로도 불립니다. 사업 분야는 ‘사회수요 선도대학(대형)’과 ‘창조기반 선도대학(소형)’ 두 개입니다. 대형은 입학정원의 10%(최소 100명 이상) 또는 200명 이상을 공학계열로 이동해야 하는데 9개 대학을 수도권·비수도권으로 나눠 선정합니다.

올해만 8개 대학에 평균 150억원씩 총 1500억원을 지원합니다. 소형은 입학정원의 5%(최소 50명 이상) 또는 100명 이상을 공학계열로 이동하는 게 조건입니다. 5개 권역별로 10개 대학에 평균 50억원씩 올해만 500억원을 지원합니다. 지원 기간은 3년으로 관련 예산은 총 6000억원이 넘습니다.

지원 대학 선정은 1단계 서류심사, 2단계 프레젠테이션과 대면평가, 3단계 최종심의를 거쳐 최종 선정합니다. 현재 1차 서류 심사를 통과한 대학들이 2차 프레젠테이션을 진행 중인데 총장들까지 직접 나서 대면 보고를 합니다. 대학의 모든 행정력이 동원돼 정작 안방 살림이 소홀할 정도입니다. 그 과정에서 대학들은 외부 컨설팅업체에 고액을 주고 자문을 받아 관련 업체만 배를 불린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선정 되든 탈락 되든 프라임 사업의 후유증은 간단치 않을 것 같습니다. 공대가 없는 숙명여대는 공대를 만들겠다고 신청을 했고, 국립대인 한국교통대는 인문사회·예체능·공학·자연과학 분야 정원을 360명 줄이는 등 전체 정원의 521명을 공학계열로 이동시킨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대학 구성원과 동문들의 반발이 거셉니다.

이화여대의 경우 4월5일 정문 앞에 ‘이화여대 사망’ ‘이화여대 명복을 빕니다’ 등의 문구가 쓰인 조화가 놓였었습니다. 정원이 줄어드는 학과 학생과 교수들이 학습권 침해라고 반발한 것입니다. 교육계 일각에선 “불확성 시대에, 불확실한 인력수급 전망으로, 불확실한 계획을 추진해, 불확실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만일 그리 되면 누가 책임을 지기나 할까요?

◇공정성·일관성 중요···대통령과 교육부 장·차관의 책임 정책 필요
역대로 교육부 장관의 평균 재임기간은 1년 남짓에 불과합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세 번 바뀌었지요.  교육정책은 일관성과 지속성이 중요한데 이런 구조 아래서 과연 가능할까요. 정권이 바뀌고, 장관이 바뀌고, 담당 공무원이 바뀌면 대학 지원 사업도 바뀌고, 선정 방식도 바뀌고, 평가 방식도 바뀌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 중인 각종 대학재정 지원사업이 다음 정권에서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3년, 5년, 10년 후에 프라임 사업이 처음에 의도한대로 갔는지 그리고 그 정책을 만들고 시행한 관료들은 어떻게 됐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라임 사업은 대학의 판도를 바꿀 만큼 지원이 많습니다. 이왕 시작했으니 공정하고 투명하게 선정하고 집행해야 합니다. 벌써부터 퇴직 교피아들이 로비를 하고, 청와대 입김이 작용한다는 설이 파다합니다. 그런 불신과 오해를 불식시키려면 철저하게 심사하고 과정을 전면 공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업 선정 기준과 사후 관리, 지속성 등에 대한 종합적인 설계가 필요합니다. BK21 사업처럼 나눠 먹기식 악습을 되풀이해선 안 됩니다. 또 결과는 어땠습니까. 정권이 바뀌면서 취지가 시들었고, 성과 또한 미흡한 게 사실입니다. 그런 풍토에서 어떻게 글로벌 대학을 키우고 노벨 수상자를 배출하겠습니까.

프라임 사업이 ‘신의 한 수’가 되려면 정책 실명제를 철저히 적용해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이준식 교육부 장관, 이영 교육부 차관, 그리고 교육부 담당 실·국장, 과장, 사무관까지 모든 관련자들의 이름을 교육사(史)에 엄중히 기록해 놔야 합니다. 정책이 엇나가지 않고 엄격한 심사와 평가, 관리가 이뤄지도록 하는 국민의 엄중한 요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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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엔 ‘홍삼’, 인문엔  ‘사탕’··· 교육부의 대학 길들이기
저출산 여파로 학생 수 감소에 직면한 대학에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2년 뒤면 고졸자 수가 대입정원 보다 적어지니 상당수 대학은 생존마저 불투명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게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지식기반과 가치창출 시대에 맞는 창의 융합형 인재를 길러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구각을 깨는 처절한 혁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대학들은 그러지 않고 있습니다. 교수와 직원들은 기득권에만 급급해 변화를 외면합니다. 교육부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마음껏 구조조정의 칼을 휘두릅니다. 각종 재정사업을 미끼로 학과 통폐합과 정원 감축을 윽박합니다. 그런데 앞뒤가 엉킵니다. 한쪽에선 이공계 늘리라고 채찍을 들고, 또 한쪽에선 인문계를 지원한다고 사탕을 내놓습니다.

교육부가 올 3월17일 발표한 ‘대학 인문역량 강화사업(CORE)’도 그 중 하나입니다. 전국 16개 대학에 12억~37억원씩 연간 600억원을 3년간 지원해 인문학을 보호·육성하자는 취지입니다. 인문학이 인류의 사상과 문화, 인성과 가치, 상상력과 창의성의 토대가 되는 자양분이라는 점에서 나름 필요한 정책일 수도 있습니다. 가톨릭대는 인문학에 경영학을 접목한 복합전공(G-Humanage), 고려대는 독문·노문·서문·일문학과 교육과정에 지역학을 접목한 실무형 인문학으로 지원 대상에 뽑혔습니다.

그러면서 교육부는 프라임 사업으로 이공계 강화를 강요합니다. 인문학과 공학 양날의 칼을 쥐고 대학을 좌지우지 하는 셈입니다. 여기에 휘둘리는 대학도 문제지만 교육부의 평가 잣대는 더 심각합니다. 재정 사업 평가기준에는 대학 총장 임용후보자 선정 때 국립대는 대학구성원 참여제(간선제), 사립대는 평의원회를 운영하면 가산점을 주는 게 들어 있어요. 사업에 선정된 뒤 총장 선출 방식을 간선에서 직선으로 바꾸면 지원액을 감축하겠다는 으름장도 놓습니다. 대학 지원과 총장 선출 방식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전형적인 길들이기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교육부의 힘만 커집니다. 통제와 간섭을 추방하려면 대학이 자존감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위기를 돌파할 수 있습니다. 고질적인 따라 하기(me to habits)부터 추방해야 합니다.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전공을 개발하고 착근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교육부 ‘양날의 칼’을 추방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