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이면 아이 대신 과학 공부하는 엄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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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대회 된 과학대회

과학의 달, 과학·영재교 진학 스펙 쌓기
“수상 경력 못 적지만 우회 표현 가능”
회당 300만원 사교육에 맡기는 부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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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과학의 달을 맞아 전국 시도교육청과 기관·학교 등이 주최하는 각종 대회가 잇따르고 있다. 과학탐구대회·자연관찰탐구대회·창의력대회 등 종류도 다양하다. 학생들의 과학적 호기심을 개발하고 문제해결능력을 기르게 돕는 게 목적이지만 학부모들에게는 또 다른 고행이다.

자녀의 수상 실적을 쌓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부모들이 많다. 대회를 주최하는 기관이나 학교에서는 “학생 스스로 탐구하면서 시행착오를 겪고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지만 학부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대회가 학부모대회가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혼자하기 무리” vs “수업만으로 가능”

초등학교 6학년 자녀를 둔 조모(44·서울 목동)씨가 지난 2월 한 달 동안 매일같이 빼놓지 않고 한 일이 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홈페이지에 접속해 공지사항을 확인하는 일이다. 자녀를 과학탐구토론대회에 내보내기 위해서다. 2월 말에 주제가 발표되자마자 미리 섭외해 놓은 아이들과 팀을 구성해서 자료 조사를 하고, 실험한 후 보고서를 작성하게 도왔다.

학원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지만 지인에게 수소문해 대학교 실험실을 빌려 쓸 수 있게 손을 썼고, 도와줄 만한 사람을 물색했다. 이 모든 일은 예선대회, 즉 재학 중인 학교에서 대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뤄졌다. 지난해에 학교에서 알려주는 일정대로 준비했다가 자료 조사하고 실험하는 데도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조씨는 “알고 보니 대부분 겨울방학 때부터 팀을 구성해 놨다가 과학창의재단에서 주제를 발표하자마자 준비를 시작하더라”며 “2~3개월 준비한 팀이 2~3주 준비한 팀보다 보고서의 질이 좋을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과학탐구토론대회는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주관하는 제34회 글로벌청소년과학탐구대회의 하나다. 이외에도 융합과학·기계공학·항공우주대회 등이 더 있지만, 탐구토론대회가 가장 인기다. 한국과학창의재단이 발표한 2015년 전국대회 참가자 수는 탐구토론대회가 165명으로 가장 많고, 융합과학대회가 93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한 학부모는 “다른 대회는 뭔가를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뿐 아니라 꼼꼼한 성격과 뛰어난 손재주가 필요하지만 탐구토론대회는 자료 찾고, 실험을 통해 보고서를 써내는 게 기본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준비하는 데 품이 덜 든다”고 말했다.

탐구토론대회는 방과 후에 실험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후 대회 당일 이 보고서를 토대로 다른 팀과 토론을 펼치는 방식이다. 평소 준비 시간이 긴 만큼 학부모들의 입김도 셀 수밖에 없다. 특히 학부모들은 “주제가 어려워 학생만의 힘으로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한다.

학생들끼리 탐구 주제와 탐구 문제를 정하고, 자료 조사를 해 보고서를 써낼 수준은 아니라는 얘기다. 조씨는 “주제가 어렵기 때문에 이 대회가 학생대회가 아니라 학부모대회가 돼가는 것 같다”며 “특히 초등학생은 수준에 맞는 쉬운 주제를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국과학창의재단 측은 “주제가 학생들의 수준을 뛰어넘을 정도로 어려운 건 아니다”는 입장이다. 한국과학창의재단 과학문화확산실 허경호 실장은 “교수·연구원 등이 머리를 맞대고 실생활과 연관 있으면서 시의성 있는 주제를 선정한다”며 “특히 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했던 교사들도 참여해 학생 스스로 탐구할 만한 수준인지, 난이도가 적절한지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말했다.

올해 주제는 곤충원료 식품으로 가장 적합한 곤충을 찾아 활용 방법 제안하기(초등부), 산업혁명 이전 사람들은 주변의 자연환경을 활용해 생활에너지를 어떻게 얻었는지 조사하고 환경 문제 개선에 도움이 되는 방안 제시하기(중등부), 폐냉장고나 폐PC 등 도시 광석 중에서 한 제품을 골라 재활용 현황과 문제점을 조사하고 개선할 수 있는 과학적 방안 제시하기(고등부) 등이다.

원칙적으론 수상 실적 입시에 못 써

학부모 입장에서는 자녀를 도울 수밖에 없다. 어른의 손을 탄 게 결과적으로 훨씬 더 훌륭하고 상을 받을 가능성도 높아서다. 중2 자녀를 둔 한윤정(45·서울 도곡동)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고 애들한테 맡겼는데, 나중에 다른 애들이 한 거 보니까 대학생과 초등학생이 한 것처럼 실력 차이가 컸다”며 “중1 때는 팔을 걷어붙이고 도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사교육의 도움을 받는 사람도 많다. 학부모가 돕는데도 한계가 있고 이것저것 신경 쓰는 것보다 학원에 맡겨두면 여러모로 편하기 때문이다.

학원에서 과학탐구토론대회 준비 비용은 한 회당 150만~300만원 정도로 비싸지만 2~3월부터 문의가 급격히 늘어난다. 강남 대치동에 있는 한 학원 관계자는 “12월부터 미리 예약해 놓는 사람도 있다”며 “수상을 하면 과학고나 영재학교 진학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학부모의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중1 자녀를 둔 직장맘 김모씨는 “아이한테 맡기기는 불안하고, 직장 때문에 도울 시간은 없으니 어쩔 수 없다”며 “비용이 싼 건 아니지만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이 비싼 비용까지 내면서 과학탐구대회에 집착하는 이유는 과학고나 영재학교 진학에 유리한 스펙을 쌓기 위해서다. 2015학년도부터 영재학교나 과학고에 지원할 때 자기소개서에 외부 수상 실적을 기재할 수 없는데도 대회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높다. 이런 대회 수상 경력이 좋은 평가로 이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씨는 “특히 과학고는 수상 경력이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라며 “공식적으로 수상 경력을 적을 수 없어도 이런 경험을 우회적으로 표현할 방법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4월 중에 원서 접수를 시작하는 영재학교는 자기소개서에 이런 경험을 적게 돼 있다. ‘수학·과학적 재능과 관련하여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나 경험들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주십시오’(한국과학영재학교) ‘본인이 가지고 있는 수학·과학 분야의 창의성에 대하여 키워드를 제시하고 이와 관련된 구체적 사례를 쓰시오’(경기과학고) 등이다.

하지만 학교 관계자들은 “수상 내역은 전혀 관계없다”고 말한다. 한국과학영재학교 김동훈 입학팀장은 “수상 실적을 명시하지 못하게 돼 있기 때문에 어떤 상을 받았는지보다 탐구하는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어떻게 해결하고 뭐를 깨달았는지를 평가할 수밖에 없다”며 “학원의 도움을 받아서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사람보다 혼자 힘으로 결과물을 완성한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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