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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거리에 울리던 비감한 선율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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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호 25면

40세의 슈바르츠코프가 부른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서소문에서 시청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버거킹이 있다. 나의 음악 듣기 역사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버거킹 매장 왼쪽 구석에 ‘오리지날 사운드’라는 이름의 레코드 가게가 있었다. 1992년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 철물점으로 바뀌었다가 버거킹에 흡수됐다.


이 작은 삼각형 공간은 다섯 명쯤 들어가면 꽉 찼다. 저녁에는 단골들이 모여 옆집 진미호프에서 생맥주를 배달시켜 간소한 파티를 열기도 했다. 좌장은 신동헌 화백이었는데 신 화백과는 연주회장에서도 가끔 마주쳤다. 선생은 예술의전당 객석 앞자리에서 무대 위의 예술가들을 스케치하곤 했다.


레코드 가게 주인은 가게 밖에 낡은 인켈 스피커 한 쌍을 내놓고 서소문 거리에 음악이 흐르도록 했다. 퇴근길에 들르면 나한테 DJ를 맡기곤 했다. 그런 때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 수 있었다. 클래식 입문 초기였는데 모차르트의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이나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트리오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같은 걸 골랐다. 그리고 가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턴테이블에 올렸다.


경쾌한 모차르트나 귀에 익은 차이콥스키는 몰라도 무거운 슈트라우스는 거리 방송용으로 적합하지 않다.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틀어주는 음반 가게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지 않을까 싶다. 황혼이 거리를 물들일 무렵, 그 순간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틀었지만 퇴근길 직장인들이 집 대신 술집으로 향하도록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1948년 완성됐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는 84세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노 대가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마지막 힘을 다 해 곡을 썼다. 가장 훌륭한 악기라고 생각했던 여성의 소프라노 음성을 오케스트라가 반주하는 양식이었다. 제목대로 그의 마지막 노래가 되었고 독일 낭만주의 리트의 대미를 장식했다.


2차 대전의 화약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았을 1948년에 슈트라우스는 어땠을까. 나치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조국 독일은 패망했다. 명예는 짓밟히고 재산도 몰수당했다. 정신세계가 붕괴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명작을 탄생시켰다. 늙은 천재의 괴로움과 체념이 독일 시인 아이헨도르프와 헤세의 명편을 만나 슬프고도 숭고한 작품으로 거듭났다.


마지막 노래들은 사랑했던 세상에 작별을 고한다. 첫 곡 ‘봄’은 납골당에서 시작한다. 2곡 ‘구월’에서 써늘한 비를 맞고 떠는 꽃은 슈트라우스 본인일 것이다. 바이올린 독주가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3곡에서는 ‘모든 감각은 지금 푹 잠들고 싶을 뿐’이라며 영원한 휴식을 간구한다. 마지막 곡에서 슈트라우스는 붉게 물든 황혼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한다. 노래는 이토록 어둡다. 그러나 또한 눈물겹도록 아름답기 때문에 클래식 초심자였던 내가 용감하게 가두에 방송을 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최근에 음반 한 장을 구했기 때문이다. 한 음악 애호가가 평생 모은 LP 수천 장이 매물로 나왔는데 조심조심 넘기며 고르다 발견했다.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가 노래하고 오토 애커만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이 작품으로 말하자면 지휘자 조지 셸이 슈바르츠코프를 반주한 음반이 첫 손에 꼽힌다. 그런데 새로 구한 음반은 지휘자도 낯설고 재킷의 슈바르프코프도 훨씬 앳되다. 집에 돌아와 음반 고수인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그가 흥분해서 외쳤다. “애커만이 지휘한 슈바르츠코프라고? 그게 진짜야? 득템했구먼.”


음반은 슈바르츠코프(1915~2006)가 마흔 살 전후인 1955년경 녹음한 것이다. 명연주로 일컬어지는 조지 셸 지휘반은 10여년 후인 66~7년 녹음으로 그녀가 50대에 접어 든 뒤의 녹음이다. 슈바르츠코프는 나이가 들며 콧소리가 강해져 듣기가 불편한데 내가 구한 음반은 목소리가 맑고 깨끗할 때 부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음색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그녀의 젊은 목소리는 그저 설익은 느낌이다.


내가 좋아하는 연주는 카라얀과 군둘라 야노비츠 콤비의 녹음이다. 슈트라우스 관현악을 장기로 삼는 카라얀은 이 음반에서도 탐미적 음향을 빚어냈다. 야노비츠의 미성에는 기품이 서려있다. 쓸데없이 감상에 빠지지도 않는다. 내가 레코드 가게 오리지날 사운드에서 턴테이블에 올린 음반도 그것이었다.


동네마다 하나씩 있던 레코드 가게는 오래전 사라졌다. 거리에는 더 이상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 퇴근길에 버거킹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이어폰을 끼고 혼자 음악을 듣는다. 조용하다. 돌이켜보면 신기한 것이 시끄럽다며 레코드 가게에 항의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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