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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새 의원님들, 실적용 법률안 남발 이제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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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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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윤
경제부문 기자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하며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국회법 24조에 나와 있는 국회의원 선서 내용이다. 내일 치러지는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될 300명은 이 선서를 시작으로 오는 5월 30일 임기를 시작한다. 부디 선서대로만 해주길 바란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보여줬던 낮은 자세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또 하나의 바람이 있다. 실적 쌓기에 연연해 무책임한 법률안 남발을 삼가 달라는 것이다. 특히 첫 단추가 중요하다. 4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19대 국회 임기가 시작된 2012년 5월 30일 하루에만 법률안 53건이 발의됐다. 이날부터 한 달 동안 409건이 발의됐다. ‘준비된 국회의원’이 많았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한 달 동안 발의된 법안 409건 중 국회를 통과한 것은 174건(42.5%)이다. 그나마 원안 그대로 가결된 것은 19건(4.6%)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수정 가결(21건, 5.1%) 되거나 대안반영폐기(134건, 32.8%) )됐다. 대안반영폐기는 같거나 비슷한 법안들을 하나로 묶어 대안을 만들고 원안은 폐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212건(51.8%)은 1383~1414일 동안 국회에서 잠을 자고 있다. 철회·폐기된 법안도 23건이다.

법안의 질도 형편없는 게 많다. 특히 이전 국회 때 폐기된 법안을 그대로 베낀 게 적지 않았다. 모 의원이 19대 국회 임기 첫날 발의한 ‘고용보험법 개정안’이 대표적 예다. 이는 18대 국회 때 폐기된 법안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다. 좋은 법인데 논의조차 안 되고 폐기된 것을 재발의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재탕 법안 중엔 그렇지 않은 게 많다. 이런 식으로 19대 국회에서만 1만6664건이 발의됐고 절반이 훨씬 넘는 9740건이 처리되지 못했다. 심지어 법안 표결 과정에서 자신이 대표 발의한 법안에 반대한 의원도 10명이나 됐다. 공동발의한 법안에 반대한 경우는 155건이다(법률소비자연맹). 쟁점 법안 몇 개를 놓고 정쟁을 일삼다가 한꺼번에 수십, 수백 개 법안을 처리하면서 생기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19대 국회의 법안 1개당 평균 처리기간은 517일로 역대 국회 중 가장 길었다. 법안 가결률 역시 꼴찌다.

국회는 법을 세우는(立法) 곳이다. 무책임하고 부실한 법률안 발의는 곧 입법권을 스스로 훼손하는 일이자, 사회적 비용이라는 것을 새로 당선되는 20대 국회의원들은 기억해 주길 바란다. 19대 국회처럼 욕먹으며 4년을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김태윤 경제부문 기자 kim.tae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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