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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1년 치 세비 반납”, 진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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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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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옛 소련과 러시아 지도자는 한 대(代)씩 걸러 대머리였다. 유독 러시아에서 들어맞는 ‘대머리 법칙’이다. 실제로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레닌은 어릴 적부터 머리가 없었으며 후임인 스탈린은 모발이 풍성했다. 뒤이어 흐루쇼프는 대머리, 그다음은 숱 많은 브레즈네프였다. 이런 징크스는 대머리인 현 푸틴 대통령까지 이어졌다.

그럼 한국은 어떨까. 이걸 따지려면 누가 대머리였는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런데 전두환 전 대통령처럼 이론이 없을 수도 있지만 이승만·김영삼 전 대통령처럼 어정쩡한 경우도 많다. 이마 넓은 것과 대머리를 무슨 수로 정확히 구별하겠는가. 모호한 개념은 늘 논란을 부른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모호성의 오류’다.

지난 4일 새누리당은 ‘국민과의 계약’이란 공약을 밝혔다. 김무성 대표 등 후보 48명의 이름으로 “갑을(甲乙) 개혁, 일자리 규제 개혁 등 5대 공약을 내년 5월까지 이행 못하면 1년 치 세비를 반납하겠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4년 전에도 일 안 하는 의원들의 세비를 반환하겠다고 선언했었다. 불행히도 그해 6월 국회는 여야 싸움으로 공전됐고 약속대로 당은 의원 140여 명의 한 달 치 세비 15억원을 토해내야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좀 지나자 세비 반환 약속은 쑥 들어갔다. 2014년 넉 달이나 국회가 헛돌았는데도 세비 얘기는 들리지도 않았다.

외면상의 명분과는 달리 세비 반납도 정략적 동기로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91년 초에도 민자당이 세비를 깎아 반납한 적이 있었다. 이 역시 전해에 세비를 22.8%나 올리자 노동계에서 이를 임금 인상 기준으로 삼겠다고 위협, 놀란 여당이 인상분을 10.4%로 낮추고 나머지를 돌려준 것이다.

어쩌면 이번 세비 반납 공약은 그전보다 더 함량 미달이다. 무엇보다 “모두를 위한 갑을 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밝혔을 뿐 구체적인 목표치가 빠졌다. 나중에 “웬만큼 된 것 아니냐”고 오리발 내밀기 딱 좋다.

어정쩡한 약속 내밀기는 더불어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전 대표는 지난 8일 “호남이 지지를 거두면 정치에서 은퇴하고 대선에도 불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이 역시 ‘지지를 거둔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세비 반납이든, 대선 불출마든 진정성 있는 공약이라면 구체적 기준이 제시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을 우롱하느냐”는 지탄에서 헤어나기 힘들 것이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