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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관광 붐 타고 뜬 ‘마지막 낙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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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호 14면

발리 여성은 아침마다 야자수 잎으로 만든 접시에 꽃과 음식을 담은 공양물(차낭)을 가족 사원의 신에게 바친다. [중앙포토]

‘신(神)들의 섬’ ‘지상 최후의 낙원’ ‘세계의 아침’.


인도네시아 중심을 이루는 자바섬과 롬복섬 사이에 있는 섬 ‘발리’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발리는 인도네시아 33개의 1급 지방자치체 중 하나다. 섬 인구는 310만 명으로 인도네시아 전체(2억4000만 명)의 1.3%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곳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연간 300만 명 이상의 외국인이 찾는다. 한국에선 신혼 여행지로 손꼽는 곳이다.


발리가 세계적인 관광지로 떠오른 이유를 찾기 위해 지난달 중순 발리의 중심인 우붓으로 향했다. 리조트가 몰려 있는 누사두아 지역을 벗어나자 차창 너머로 한적한 마을이 나타났다. 거리 곳곳에서 야자수 잎으로 만든 접시가 눈에 띄었다. 접시 안엔 꽃과 음식이 담겨 있다. 발리 여성들이 아침마다 신에게 바치는 공양물 차낭(canag)이다. 집 안의 가족 사원과 힌두교의 주요 신을 모시는 마을 사원엔 색색의 차낭들이 놓여 있다. 이슬람 신도가 대부분인 인도네시아에서 발리는 유일하게 주민의 80% 이상이 힌두교를 믿는다.가종수 일본 슈지쓰대학원 교수는 저서 『신들의 섬 발리』에서 “15세기께 자바섬에서 이슬람교 세력이 커지자 힌두교를 따르던 마자파히트 왕조가 발리로 피신하면서 힌두교를 전파했다”고 했다. 발리의 힌두교는 인도의 힌두교와 달리 토착신앙과 불교가 섞여 발전했다. 발리 힌두교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게 사당 위에 돌로 만든 의자(파드마사나)다. 여행 가이드인 조이 푸투는 “발리인은 신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기고 제삿날에만 파드마사나에 앉는다고 생각하는 데 반해 인도에선 밀폐된 사원 안에 신상을 모셔둔다”고 말했다. 발리는 이론보다 제물을 바치거나 사원의 축제에 참여하는 의식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덧붙였다. 이 섬엔 4600여 개의 사원이 있어 1년의 절반가량은 종교 행사가 열린다. 조이 푸투는 “발리인에겐 힌두교가 삶의 일부”라고 말했다.


발리가 처음 세계에 알려진 데는 과거 네덜란드의 식민지 정책이 한몫했다. 1602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동인도회사(VOC)를 설립하면서 식민지 경영을 시작했다.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시장을 장악하는 데 주력했던 동인도회사는 별다른 특산물이 없었던 발리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1920년 초 유럽에서 식민지 관광이 인기를 끌자 네덜란드 정부는 발리섬 개발에 나섰다. 당시 유럽에선 열대의 섬나라를 동경하는 젊은 부자가 많았다. 네덜란드 정부는 관광국을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에 설립하고 발리를 ‘마지막 낙원’으로 선전했다. 또 네덜란드 왕립 우편 선박회사가 운영하는 발리섬 패키지 여행을 내놨다. 발리로 가는 정기선이 운영되면서 유럽과 미국의 상류 계층 사이에선 발리 관광 붐이 일었다. 여행객 중 한 명이 세계적인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다.


발리가 세계적인 관광지로 떠오른 또 다른 비밀이 숨겨진 곳이 우붓이다. 울창한 열대나무 숲엔 300여 마리의 원숭이가 뛰노는 원숭이사원이 있다. 이곳에서 왕궁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우붓에서 가장 번화한 골목이다. 좁다란 길가엔 상점이 즐비했다. 상당수가 코끼리 조각이나 그림을 파는 곳이었다. 우붓엔 네카·블랑코·아르마 미술관 등 대형 미술관을 비롯해 50곳이 넘는 갤러리가 있다. 이 때문에 우붓은 ‘발리의 몽마르트’로 불린다. 이 중 우붓 왕궁 옆에 있는 푸리 루카산 미술관을 찾았다. 발리섬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으로 1956년에 문을 열었다. 붉은 수련이 핀 연못을 중심으로 4개의 전시관이 있다. 첫 전시관으로 들어서자 벽면 중앙에 걸린 커다란 액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미술관을 설립한 우붓의 왕 수카와티 사진이다. 당시 자바섬에서 신교육을 받은 수카와티 왕은 네덜란드 정부의 최대 협력자였다.


가 교수는 저서에서 “수카와티 왕은 1920년대 후반부터 발리의 전통문화를 서구 세계에 통용되는 민족 예술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며 “서구 문화를 배우기 위해 우붓 왕궁에 숙박 시설을 세우고 유럽과 미국의 예술가를 초청해 조언을 구했다”고 밝혔다. 이때 우붓에 온 예술가가 네덜란드 화가 루돌프 보네와 독일인 화가 발터 스피스다. 보네는 1929년 발리에 온 이후 수십 년간 우붓에 살면서 발리의 전통 회화에 원근법 등 서양 화법을 가미한 우붓 양식을 만들었다. 또 왕을 도와 미술협회인 ‘피타마하’를 만들었다. 발리 전역에 125명의 예술가가 참여한 모임으로 해외 전시 활동 등으로 발리 회화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시기 스피스도 우붓에 머물렀다. 화가이자 음악가·언어학자·무용가·사진가이기도 한 그는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다. 현재 발리에서 공연되는 전통춤인 케착(Kecak)이나 바롱(Barong) 댄스를 관광객이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재연출한 것도 스피스다.

인도네시아 발리섬 최남단 75m 높이 절벽 위에 있는 울루와투 사원은 6대 힌두사원 중 한 곳으로 바다의 신을 모신다. 염지현 기자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발리섬의 가장 남쪽에 있는 울루와투 사원을 찾았다. 발리의 6대 사원 중 한 곳으로 바다의 신을 모신다. 사원 입구에서 발리 전통 의상인 ‘사롱(Sarong)’을 빌렸다. 발리는 사원을 신성하게 여기기 때문에 반바지 차림으로 입장할 수 없다. 긴 보자기 모양의 사롱을 허리에 둘러 다리를 감싼 후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사원 안으로 들어서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거센 파도가 밀어닥치는 75m 절벽 위에 사원이 아슬아슬하게 자리해 있었다. 한국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석양이 질 무렵 인도네시아 전통악기 가물란에 맞춰 케착 댄스 공연도 펼쳐졌다.


이처럼 발리는 독특한 발리 힌두교와 전통문화를 관광 상품화 하는데 성공하면서 세계적인 관광지로 떠올랐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여전히 발리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전통을 보존하는 관광정책을 펴고 있다. 대표적인 게 발리에선 야자수보다 높게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건축법이 정해져 있다. 힌두교의 신들이 야자수를 밟고 다닌다고 믿기 때문이다.


최근엔 디젤 발전소의 원료를 액화천연가스(LNG)로 바꾸는 사업에 관심이 많다. 기존 디젤 발전으로는 오염물질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사업에 LNG 설비 기술력이 뛰어난 한국 기업이 잇따라 참여하고 있다. 지난달 18일엔 발리 뮬리아 리조트에서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과 한국해양대 주최하고 인도네시아 정부가 참여한 ‘한국·인도네시아 해양포럼’이 열렸다.


이날 아궁 구스완도노 인도네시아 에너지부 차관은 “최근 외국인 투자 제한을 풀고 행정 절차를 줄여 외국 기업의 인도네시아 진출이 쉬워졌다”며 “LNG를 비롯해 관광사업에 한국 기업들이 적극 나서길 바란다”고 밝혔다.


발리(인도네시아)=염지현 기자?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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