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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운하 본뜬 바타비아 곳곳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흔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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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호 14면

1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세마랑에 있는 삼포공 사찰. 명나라 정화 함대가 도착한 곳에 세워졌다. 그가 이곳에서 신의 반열에 올랐음을 상징한다.

2 오늘날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인 옛 바타비아의 네덜란드 식민도시 풍경. [사진 주강현·자카르타 코타박물관 소장, 19세기]

해양 실크로드 취재 루트의 폭과 길이는 만만하지 않다. 취재팀은 인도네시아만 두 번 탐사했다. 지난해 12월, 자카르타를 거쳐 믈라카해협 탐사를 끝냈다. 지난 3월에는 자바섬의 세마랑·수라바야를 거쳐 수마트라섬의 메단과 반다아체, 술라웨시섬과 말루쿠제도를 다녀왔다.


이번엔 자카르타를 경유하여 먼저 세마랑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차이나타운이 버티고 있고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지어졌던 창고 건물이 즐비한 자바 북부의 이 유서 깊은 도시는 지금 리노베이션 열풍이 한창이다. 오랜 항해의 종착지로서의 고단했던 역사와 제국의 흔적 등이 교차하면서 묘한 아우라를 풍기는 도시 곳곳에는 해양 실크로드의 흔적이 배어 있다.


삼포공 사찰부터 찾았다. 세마랑을 통해 자바에 들어온 정화를 기리는 곳이다. 정화 함대의 자바 방문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어 전승됐다는 물증이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자바 북부에 이르는 항해 루트가 일상적으로 존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함대는 세마랑에서 수마트라 팔렘방을 거쳐 믈라카해협으로 떠났다. 세마랑의 차이나타운이 고색창연한 건 정화 함대가 그곳에 도착한 지 600년에 가까울 정도로 오래됐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처음 자바섬에 상륙한 데막세마랑에는 VOC(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물류창고가 즐비하다. 그런데 가장 눈에 띄는 랜드마크는 ‘1000개의 문’을 가졌다는 거대한 라왕 세우다. 네덜란드의 철도회사 본부로 쓰였다는데 텅 빈 방들이 거짓말처럼 수도 없이 이어진다. 줄 지어선 열주의 회랑에서 철도로 자바를 지배했던 제국의 동맥이 감지된다. 1753년 세워진 임마누엘 교회의 반듯하고 품격 있는 외모와 다양한 은행, 세관 건물에서도 ‘제국이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술라웨시와 말루쿠 등지에서 수집된 향료들이 세마랑으로 집결했고,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두 곳을 방문했다. 게퉁 송고 힌두사원과 데막의 아궁 이슬람사원이다. 현재도 분출하는 활화산 계곡의 해발 1000여m 고지에 자리 잡은 게퉁 송고는 8세기께 비슈누와 시바에게 바쳐진 사원군이다. 인도로부터 힌두문명의 물결이 자바 북부까지 미쳤다는 결정적 증거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족자카르타의 프람바난 힌두사원과 연계된다. 10세기 초 마타람 힌두왕국의 프람바난보다 앞서 세마랑에 힌두사원이 들어선 것이다. 인도양을 건너온 힌두교가 자바 북부를 석권하고 더 북상하려다 멈춘 셈이다.

3 자바섬 수라바야의 아랍인들은 이슬람을 처음 포교했던 현인 암펠이 묻힌 암펠 사원을 중심으로 모여산다.

세마랑 시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데막은 지금은 내륙으로 들어와 있으나 본디 해안가였다. 이슬람이 처음 자바섬에 상륙한 지점이다. 마자파히트 힌두왕국이 멸망하고 자바가 무슬림 사회로 변한 역사적인 장소다. 그리하여 1466년 자바섬에서 가장 오래된 아궁사원이 세워졌다.


세마랑에서 자바의 제2의 도시 수라바야까지는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 수라바야는 한국으로 치면 부산이라고 할까. 중국인촌이나 네덜란드 유산은 세마랑과 다를 바가 없는데 수라바야에는 특별히 아랍인 구역이 존재한다. 자바에 이슬람을 전파시킨 현인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암펠. 그가 묻힌(1481년) 암펠 모스크를 중심으로 아랍인 후예들이 모여 산다. 오만 등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반도에서 출항한 ‘신드바드’ 아랍상인의 족적이 자바 북쪽까지 미친 결과다. 향료는 이들 상인의 손을 거쳐 홍해를 통해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옮겨졌고, 베네치아는 오랜 세월 향료의 유럽 거점으로 작동했다. 이 모든 역사적 동력을 아랍 상인들이 만들어냈으며, 그 흔적이 아랍 구역으로 남은 셈이다.

4 중국인과 아랍인 거리를 유럽인 거리와 구분하는 오래된 젬바탄 메라 다리. 네덜란드인이 건설했으며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사진 주강현]

한때 영화를 누렸던 중세도시 바타비아 칼리 마스 강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유럽인, 동쪽에는 중국인과 아랍인이 살았다. 네덜란드인이 만든 젬바탄 메라라는 유서 깊은 다리가 예나 지금이나 동서를 연결하는 중이다. 암스테르담의 건축물이 고스란히 옮겨져 인도네시아-네덜란드 융합의 결과물로 우리 앞에 남겨졌다.


수라바야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삼포에르나 담배박물관을 방문한다. 19세기 이래로 담배산업에 종사한 중국인의 족적을 남긴 박물관은 담배가 포르투갈에 의해 이곳에서 증식된 식물 실크로드의 이동과 전파를 알려준다. 또한 중국인 선대 자본의 힘이 인도네시아에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역량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수라바야에서 건너편 마두라섬은 다리로 연결되고 있다. 다리를 건너 마두라 서단의 방칼란으로 갔다. 맹그로브 숲이 이어진 해안의 끝자락에 마두라해협을 밝히던 등대가 나타났다. 1878년 세워진 빌렘 3세를 기념하는 등대다. 현판의 글씨가 또렷하다. 향료를 실은 거대 선단들이 이 해협을 빠져나가 스리랑카 남단의 갈을 거쳐 유럽으로 향했던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자바섬의 북단은 바타비아, 오늘의 자카르타다. 세마랑이나 수라바야에 비하면 자카르타는 그래도 한국인에게 친근한 도시다. 배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은 도로마다 물난리가 나고 쓰레기는 쌓여 있다. 항구 주변의 슬럼가 풍경은 방문객을 우울하게 만든다. 1000만 명이 넘게 사는 메트로폴리탄의 대기는 매캐했다. 한때 영화를 누렸던 중세 도시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서양인이 동양에 건설한 최고의 식민도시 중에 인도의 고아와 더불어 바타비아만 한 항구가 있을까.


바타비아는 오늘날의 자카르타 북부 해안에 네덜란드인이 건설한 식민도시. 고대 로마 시대에 용병으로 명성을 떨친 자신들의 조상 이름을 식민도시에 내걸었다. 자신들이 출발한 암스테르담을 본떠 항구로부터 내륙으로 들어가는 운하를 만들고 창고를 건설했다. 그런데 운하는 실패작이었다. 화물 수송만 생각했지 오염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운하는 고스란히 남아 자카르타 시내를 지금도 적신다.


아라비아·차이나·유럽이 어우러진 아체창고 건물엔 VOC 마크가 선명하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다. 유럽에서 인도양을 거쳐 동아시아로 오자면 반드시 믈라카해협을 거쳐야 했다. 싱가포르와 수마트라 주변의 좁은 믈라카해협은 포르투갈의 관할구역이라 무사통과가 어려웠다. VOC는 안전한 순다해협을 택했다. 수마트라섬과 자바섬 사이의 좁은 물목이 순다해협. 그 해협의 끝자락에 순다켈라파 항구를 건설했다.


400년 넘은 순다켈라파의 방파제로 나가 본다. 하역작업으로 분주하다. 인도양을 누비던 그때 그 당시 400여 년 전의 선박 전통을 이어받은 현대적 목선이 아직도 활약 중이다. 보르네오·수마트라·술라웨시 도서의 화물을 담당한다. 과거에는 말루쿠제도의 향료를 선적해 바타비아로 집결시키고, 여기서 VOC 선박에 재선적하여 유럽으로 향했다. 향료 값은 거의 황금 값이었다. 암스테르담은 세계의 물산이 모여드는 최대의 항구가 되었으며 구할 수 없는 물건이 없었다.


바타비아는 제국 물산의 현지 집결처이자 중개무역의 거점이었다. VOC는 동남아 곳곳에 벽돌창고를 세운다.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창고로 속속 동방의 값진 물건이 모여들었다. 수백 년 넘은 창고들이 지금도 남아 있으나 폐허 더미로 방치돼 있다. 일부는 해양박물관으로 생명을 이어간다. 시설이랄 것도 없는 박물관이지만 VOC 창고 건물에 진열된 전통선박 전시품만큼은 세계적 수준이다.


1653년 네덜란드에서 출항한 헨드릭 하멜은 인도 고아를 거쳐 바타비아에 머물렀다. 거기서 포르모사(대만)를 거쳐 데지마(나가사키)로 향하던 도중 표류하다 제주도에 도착했다. 조선을 탈출하여 되돌아갈 때도 다시 나가사키를 거쳐 바타비아와 고아를 관통하는 노선을 택했다. 바타비아 항구 거리를 걸으며 하멜과 그의 친구들을 생각해봤다. 암스테르담에서 바타비아를 거쳐 한반도까지 그 어떤 연속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에서부터 극동에 이르는 세계 자본주의 대동맥이 작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식민청사로 쓰이다 박물관이 된 1층 전시실에서 매우 중요한 금석문 하나를 만난다. 포르투갈이 자바에 처음으로 상륙하면서 술탄과 맺은 협약문을 각인한 비석(1522년)이다. 이로부터 20세기까지 오랜 식민과 제국의 각축이 시작되었고, 향료가 끊임없이 유럽으로 흘러갔다.


향료 탐사의 마지막 항로는 수마트라. 자카르타에서 수마트라 메단으로 날아갔다. 메단 역시 무슬림 지역이기는 하지만 매우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수퍼마켓에선 맥주를 팔았다. 이슬람 사회에서 술을 파는 가게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 메단은 절반 정도만 무슬림이고 불교도, 기독교도도 제법 된다. 당나라의 인도 구법승들이 서역 실크로드가 아니라 남방항로를 택할 경우에 수마트라 남방의 팔렘방을 반드시 거쳐 갔다. 해상왕국으로 불교국가였던 스리비자야의 팔렘방은 삼불재(三佛齊)로 불릴 정도로 왕성한 불교국가 수도였다. 그 덕분에 오늘의 수마트라 메단에는 거대 불교사원이 들어서 있다.


수마트라의 마지막 종착역인 반다아체에 닿았다. 지난해 연말에 탐사한 믈라카가 바로 건너편. 마침내 수마트라-자바-발리로 이어지는 징검다리의 초입에 당도한 셈이다. 아체란 무슨 뜻인가. 아라비아와 차이나와 유럽의 머리글자를 합쳐서 아체가 되었다. 그만큼 문명사적 융합이 일찍부터 전개된 곳. 아체는 지극히 독립적이라 자바섬 주도권에 대항하면서 반군을 조직하여 싸우기도 했다. 지금도 아체는 독립을 꿈꾼다. 자바와는 풍토는 물론이고 기질 자체가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 최초로 이슬람이 포교된 곳도 아체다. 언제나 믈라카해협을 통한 새로운 문명의 씨앗이 들어오던 길목이며, 향료무역의 길목이며, 온갖 침략과 전쟁의 길목이기도 하다. 아체 앞의 아름다운 사방섬에는 일본군 진지가 1000여 곳이 남아 있다. 이 섬은 군사적 요충지로 거친 역사의 출입처였다. 아체 시내에는 장엄한 네덜란드인 묘역이 남아 있다. 얼마나 많은 열강의 장사꾼·군인·종교인 등이 이 길목을 거쳐 갔는지를 이 묘지가 웅변해준다. 아체는 후추의 땅이기도 하다. 많은 양의 후추가 유럽은 물론이고 중국으로도 건너갔으며, 일부는 조선으로도 건너가 ‘후춧가루’가 되었다. 이제 그들 향료의 본산이랄 수 있는 말루쿠제도와 술라웨시로 넘어갈 시간이다.


다음 회에는 스파이스 루트(향료의 길) -下-인도네시아 술라웨시·말루쿠 편이 게재됩니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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