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트는 봄기운과 민속소재의 작품들 첫 대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박경용<시조시인>】그 동안 스스로의 시업에 꽤나 게을리 했던 내가 여러분의 한 묶음시작앞에서 설렘의 눈을 뜬다. 꼭 외경스런 미지의 그 무엇에로 첫발을 떼어놓는 듯한 그런 기분이다. 백지상태에서의 시작이란 호기심과 경이, 동경과 신비와 모험, 그리고 감동을 거느린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 받기 때문이다.
무릇 대상을 파악하는 여러분의「시의 눈」도 이러해야 하리라. 굳혀진 선입감을 깨뜨리고 찌든 관념의 껍질을 찢고, 오로지 갓난이의 눈으로 대상을 받아들여야만 새로움의 의미가 태어나게 마련이다. 한말로, 이 새로움을 낳는 경이의 눈이야말로 우리 시정신의 밑천인 것, 다함께 이 밑천을 살찌워 나갈 일이다.
싹트는 봄기운을 여러분의 작품 속에서 비로소 만끽했다. 흔하디 흔한 봄의 시편들 중에서 애써『이른 봄날』『눈뜨는 나목』『들길에서』등 3편을 골라놓고 다시 한번 조심스레 봄을 맛보았다.
아아, 사건이다. 애당초 봄기운조차도 등지고 살아온 나야 물론 사건의장본인임에 틀림없지만, 지레 봄을 만난 끝에 그걸 읽고 구가하는 이 사람들의 젖은 목소리가 고작 이 정도라는 말인가.
이 정도에 머문 내질이라면 굳이 인위적인 재구성의 봄을 맞을 까닭이 무엇인가. 저 산야에 던져져 피부로 직접 봄을 숨쉬는 편이 훨씬 현명하리라.
거듭 나는 봄을 맞아 마냥 시들한 봄의 편린들만 만난 골이니, 사건이라면 이보다 더 엄청난 사건이 어디 있을 것인가·민속적 소재를 다룬『쥐불놀이』와『설날 아침에』며,『생일』도 그런 점에서는 매한가지.
도무지 감흥이 배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어느 자락에도 신명 잡힌 춤사위라고는 깃들여지지 않은「억지 춘향격」의 몸놀림들일 뿐.
몰라라, 이 모두가 신명을 잃은 채 시들하기만 한 내 자신에게 달린 문제가 아닐는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