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5)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78)|위창과 유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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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렇게 사회활동을 끊고 집에 칩거하였건만 전력이 혁혁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민족의 원로이고 지도자의 하나로 숭앙하고 있었다. 따라서 총독부 경찰당국도 그의 동정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위창은 이 무렵 경운동에 있는 서예가 우제 민형식집의 사랑에 거의 날마다 나가 글씨 쓰기와 한시 짓기로 소일하였다.
돈의동 자택으로 끊임없이 형사들이 찾아와 동정을 살피고 관청과 친일단체에서 몰려와 시국담화니, 전쟁에 협력하는 글을 써달라느니 하고 졸라댔지만 집안에 들어앉아 사회활동과는 담을 쌓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아느냐고 단연 이것을 거절하였다.
이런 경우 위당 정인보는 방에 이불을 쓰고 드러누워 신장병이라고 앓는 시늉을 하며 일체의 전쟁협력 행동을 거부하였는데 어쨌든 오뉴월 파리떼 같이 모여드는 이들 일제의 끄나풀들을 퇴치하는 것이 큰 일이었고 고역이었다.
어떤 때는 위창은 근처에 있는 파고다공원에 들어가 오랫동안 거닐며 성가신 파리떼들을 피하기도 하였는데 종시일관 단호히 이들을 거부해 청절을 더럽히지 않았다.
위창의 청절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내고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유대치와의 관계에 대해 내가 들은 이야기를 여기서 피력해 두려고 한다. 이것이 진짜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윤치호는 그때 미합중국「푸트」공사의 통역관으로 궁중에 무상출입 해 고종을 뵙고 여러 가지 국정에 대해 상주할 기회가 있었다. 그의 견저인 『좌옹일기』를 보면 유대치를 「대치장」이라고 부르고 대단히 존경하였는데 국정개혁에 대해 윤치호가 상주한 의견은 모두 유대치의 의견이었다고 윤치호는 쓰고 있다. 그 국정개혁의 의견은 지금 안목으로 보아도 당당한 것이어서 유대치가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 좌옹일기를 초록한다면-.
1883(계말)년12월28일(목) 이날 오후 1시에 미국공사가 외교문을 방문하다. 저녁 4시께 나는 금춘장(박영효)의 강정에 가서 대치(유대치)·이순(박제경)·만여·중명(오세창)과 더불어 설경을 완상하다.
1884(갑신)년2월13일 (토)밤에 이순·만여·중명과 함께 대치장댁에 모여 한동안 국사를 담론하다가 8시 공사관으로 돌아오다.
1884년2월15일(월)
오후에 대치장을 방문하다. 밤에 대치·만여·중명과 더불어 달을 보며 답교하다.
1884년2월23일(화)
밤에 대치를 중용함으로써 선각자를 장려하는 것을 보이도록 하시라고 상(고종)께 아뢰다.
1884년2월24일(수)
이날 대치촵만여·중명 등 제우와 더불어, 하도항행을 가보다.
이렇게 박영효·유대치·윤치호·오세창 등은 늘 모여 나라일을 의논하고 유대치를 중심으로 개화당의 혁신운동을 추진시켜 나간 모양인데 김옥균이 앞장서서 드디어 그해 10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유대치는 10월20일의 정변 첫날 소식을 자세히 듣고 이번 일이 실패할 것 같다고 걱정하더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혁명은 실패해 10월20일에 김옥균일행은 인천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유대치는 이 정변의 배후인물이므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혹시 의창에게도 화가 미치지 않을까 해 의창을 데리고 떠나기로 하였다. 유대치는 세상에서 갑신정변이 성공하면 대통령으로 앉힐 인물이라고 떠들어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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