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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김무성 ‘정치 쇼’가 돋보이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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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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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영화 ‘도장 들고 튀어라’의 주인공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이하 경칭 생략)는 멋있었다. 해풍에 머리칼을 날리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부산 영도다리를 거니는 사진은 압권이었다. 온 나라의 고민을 홀로 짊어진 우국지사가 따로 없었다. 그 시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오른 우스개 댓글 중 하나다. “배우 송중기한테 ‘태양의 후예’ PD가 야단쳤답니다. ‘중기야, 김무성이 좀 봐. 연기를 하려면 저렇게 제대로 쇼를 해야 돼’라고요…. ㅋㅋ.”

더불어민주당은 “새누리 공천은 청와대의 기획·감독과, 친박계의 실행, 그리고 김 대표가 조연한 막장 드라마”라고 비난했다. 정확한 지적이다. 하지만 함정은 시청자들이 욕하면서도 보는 게 막장 드라마라는 점이다. 새누리의 공천 드라마는 더민주의 시청률을 압도했다. 진박 감별-유승민 죽이기-옥새 파동의 흥미진진한 스토리라인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따지고 보면 새누리의 공천은 별게 없었다. 현역 의원 물갈이 비율은 30% 정도로 19대와 비슷했다. 오히려 이해찬·정청래 등 핵심 의원들을 컷오프시킨 더민주의 공천 학살이 더 볼 만한 19금 드라마였다.

그럼에도 왜 새누리 공천에 눈길이 쏠렸을까. 우선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배신자 심판’를 외치며 드라마 초반의 분위기를 잡았다. 박 대통령은 연일 현지에 내려가 진실한 후보를 돕는 ‘보이는 손’으로 뛰었다. 15일의 공천학살은 계산된 날짜였다. 그날은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적 바둑 대결에 이목이 쏠린 날이었다. 그럼에도 공천 파문이 커진 까닭은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의 뛰어난 연기 덕분이었다. 원래 막장 드라마는 ‘나쁜 남자’ 캐릭터가 몰입도를 좌우한다. 이한구는 투덜대는 김무성을 향해 “바보 같은 소리”라 퍼부었고, 컷오프당한 현역들에겐 “실컷 해먹지 않았느냐”고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이한구는 마지막까지 유승민을 구박했다. “스스로 결단하라”며 탈당하게 만든 뒤, 그 다음 날 이재만을 단수공천했다. 그리고 불쌍한 유승민을 향해 마지막 멘트를 날린다. “그동안 꽃신 신고 꽃길만 걸어왔다. 자기 정치를 위해 당에 침을 뱉고 떠나느냐.” 이런 멘트는 ‘막장 드라마 퀸’인 임성한 작가도 감히 엄두를 못 낼 수준이다. 어디 이뿐이랴. 다른 친박 조연들도 깨알 같은 악역을 소화해냈다. 진박 인증샷을 자랑하던 이재만은 무공천 위기에 빠지자 새벽 닭이 울기도 전에 “나는 진박이 아니다”며 스스로를 부정했다. 진박 원조인 윤상현은 막말 파문으로 컷오프되자 “아직 할 일이 많다”며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사실 김무성의 옥새 파동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큰소리치다가 ‘공천권을 이한구에게 넘겨준’ 황당한 현실에 소극적으로 저항했을 뿐이다. 무공천 3곳의 타협에도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과 유승민의 정면충돌을 막았다. 여론조사대로 유승민·이재오·김영순이 새누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면 박 대통령도 정치적 타격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이재오는 18대 때 김무성을 낙천시킨 주인공이다. 그런 이재오를 살려줌으로써 대인배 이미지를 구축한 것도 김무성에겐 덤이다.

옥새 파동을 보면 영화 ‘친구’와 비슷하다. 김무성은 온몸에 칼을 맞고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라는 유승민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또 모두가 친박 줄서기를 할 때 김무성 홀로 “내가 니 시다바리가?”라고 대든 것이나 다름없다. 온갖 모욕과 수모를 받으며 “(그의 몸무게를 빗대) 고기 값도 못하느냐”는 궁지에 몰린 끝에 나온 반격이다.

일단 옥새 파동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김무성은 ‘노(No)라 할 수 있는 용감한 정치인’이라는 값진 이미지를 얻었다. 하지만 청와대와 친박에겐 미운털이 박혔다. 앞으로 대선 때까지 불편한 동거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과연 그가 마지막까지 영화의 주인공이 될지는 지켜볼 대목이다. 한국 영화는 ‘주인공은 절대 끝까지 죽지 않는다’가 원칙이다. 김무성은 정말 엔딩 자막이 내려올 때까지 외롭게 가시밭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