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언 못 알아본 검시시스템 아직도 그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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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2014년 6월 12일 전남 순천시의 매실밭에서 변사체가 발견됐다. 벙거지를 쓴 노인이었다. 경찰은 단순 노숙자로 추정하고 시신을 순천의료원으로 옮겼다. 현장에 법의관은 출동하지 않았다. 검안을 맡은 일반의는 왼손 검지·약지 절단 등의 사망자 신체 특징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경찰은 단순 변사사건으로 다뤘다. 하지만 40일 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시신임이 확인됐다. 한국 검시체계의 허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일이었다.

법의관 20명이 매년 5000건 부검
변사 통계·기준도 검·경 제각각
전문가 “미국식 통합시스템 급해”

만약 시신 발견 현장에 법의관이 나갔으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국과수의 이한영 법의관은 “단정하긴 어렵다”면서도 “시신의 부패도 의복 특징 등의 주변 상황을 단서로 삼아 이르면 일주일 안에 신원 확인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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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론의 질타를 받은 경찰은 형사·수사과장을 변사 현장에 보내고 71명이던 경찰 소속의 ‘검시조사관’을 두 배가량으로 늘리겠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변사 현장에는 담당 경찰관들만 출동한다. 과장 수준의 간부가 나가는 일은 극히 드물다. 검시조사관이 103명(2015년 기준)으로 32명이 늘긴 했다. 검시조사관은 의사가 아닌 간호학·임상병리학·생물학 등의 전공자들이다. 선발 뒤 6개월간 교육을 받는다.

“유병언 사건 이후에도 바뀐 게 없어요.”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이숭덕(53) 교수의 말이다. 그는 “법의관과 같은 진짜 전문가가 부족하니 검시조사관 등 대체 인력을 활용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결국 검시 전반에 대한 질을 낮추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렇자 정부는 법의관 수를 매년 10명씩 4년간 늘리겠다는 계획을 지난해에 내놨다. 그 뒤 지금까지 법의관 지원 의향을 밝힌 의사는 10명 미만이다. 법의학회 관계자는 “처우 개선 없이 정원만 늘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의 법의학자는 총 51명이다. 국과수 법의관이 28명, 검안의가 10명, 법의학 교수가 13명이다. 국과수 법의관 20여 명이 매년 4000~5000건의 부검을 도맡아하고 있다. 1인당 약 250건의 부검을 처리한다.

기본적인 변사 통계도 엉망이다. 서울경찰청은 2013년 서울에서 발생한 변사사건을 권역별로 분류해 집계했다. 하지만 2014년에는 그 작업을 하지 않았다. 해마다 기준이 다르다는 의미다. 검경의 변사 통계에도 차이가 있다. 대검찰청이 집계한 2014년 변사자는 2만9461명이다. 같은 기간 경찰의 통계에는 2만7605명으로 돼 있다. 1856명의 차이가 난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경찰의 변사 통계는 현장 통계라 정확하지가 않다. 추후에 사인 등을 보고 통계를 수정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데이터 자체에 신뢰가 낮다고 봐야 한다”며 문제가 있음을 인정했다.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유성호 교수는 “변사의 범위를 규정하는 명확한 지침이 없고 시각과 관심이 다른 두 조직이 각각 통계를 만들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긴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법의관실(Medical Examiner Office)’ 같은 독립기관이 우리나라에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MEO에 속한 법의관은 검시에 대한 독자적 권한을 갖는다. 국과수 양경무 법의관은 “미국과 같은 통합적인 시스템을 도입해야 ‘죽음’을 다루는 국가의 능력이 제대로 갖춰질 것”이라고 말했다.

채승기 기자 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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