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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발생하면 아이 혼자 진술하게 하지 마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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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학기 학부모의 고민, 학교폭력

학교가 폭력 인지 후 14일 이내에 학폭위
재심 땐 피해 입증 서류 등 추가 제출 가능
왕따 피해 땐 관련 카톡·문자 사진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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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초 학부모들은 자녀가 학교폭력에 휘말려 피해자나 가해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많다. 중학교 2학년 아들을 둔 학부모 김씨(44)씨는 “지난해 학교폭력에 휘말려 강제 전학을 당한 아들 친구가 있었다”며 “내 아들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렵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 건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최근 학교폭력 심의 건수가 늘고 있으며 심의 결과에 불복해 재심을 청구하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학부모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봤다.

늘어나는 학폭위 결정 재심 청구

전국 초·중·고에서 상반기 학교폭력실태조사(초4~고3 대상)가 한창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학교폭력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학교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응답은 2012년(2차 조사) 8.5%에서 2015년(2차 조사) 0.9%로 줄었다.

하지만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이하 학폭위)에서 이뤄지는 학교폭력 심의 건수는 늘었다. 전국 초·중·고 학교별 학폭위 심의 건수는 2013년 1만7749건에서 2014년 1만9521건으로 10%(1772건 증가) 늘었다. 학폭위 심의 결과에 이견이 있을 때 진행되는 재심 청구 건수는 더 큰 폭으로 늘었다. 피해자 측의 재심 청구는 2012년 267건에서 2014년 493건으로 84.6%, 가해자 측 재심 청구는 305건에서 408건으로 33.8% 증가했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학폭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학폭위는 학교가 학교 폭력 사안을 인지한 후 14일 이내에 열게 돼 있다. 5인 이상 10인 이하로 구성되며 이 중 70% 이상이 교사·학부모 등 해당 학교 관계자다. 이들은 과반수 출석에 과반수 의결로 사건을 심의·의결하는데, 가·피해자를 규정하고 서면 사과, 학급 교체, 전학 등 가해자에 대한 조치까지 결정한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조정실 회장은 “학폭위 위원 구성에서부터 문제가 많다”며 “학폭위 내에는 학교폭력 사건을 객관적·중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지난해 교육부 국감에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전국 초·중·고 학폭위 위원 7만1060명 중 학부모는 57.4%, 교사는 29.2%인 것으로 나타났다. 외부 전문가 비중은 20% 미만으로 경찰 11.5%, 청소년 전문가 1%, 변호사 0.7%, 의사 0.2%였다.

서울 양천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4년 동안 학폭위 위원 활동을 했던 안모(49)씨는 “학폭위 구성에 문제가 있다”고 털어놨다. “학부모들은 한 다리만 건너면 가해자·피해자 학생과 다 얽혀있을 수밖에 없는데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유지하는게 얼마나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1시간 만에 끝난 학폭위, 공정한 조사 가능할까

학교폭력 피해 학생 아버지 오모씨는 2014년 고교생이던 아들이 학교폭력 피해자로 학폭위 조사를 받았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억울하다는 생각뿐이다. 당시 서울 강서구 Y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모군과 오모군은 급식 시간에 벌인 작은 다툼이 폭행으로 번진 경우였다. 가해자 이군은 배식판을 엎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오군의 눈을 향해 던졌다.

학폭위가 열리고 학교 교사의 사건 조사서, 가해자 학생의 진술서·반성문·심리소견서, 피해자 학생의 진술서, 목격 학생의 진술서가 조사 자료로 제출됐다. 하지만 학교 측이 조사한 피해자 측 증거는 진술서 한 장뿐이었다.

피해 학생 아버지 오씨는 “조사 과정에서 진단서·심리소견서 등 피해 학생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관련 서류를 제출하라는 안내도 없었다”며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학폭위가 열렸고 피해자 측 진술 시간은 20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해 학생 측 진술서엔 “피해 학생이 먼저 심한 욕을 먼저 해 순간 화를 참지 못해 실수를 저질렀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피해 학생의 아버지 오씨는 “아이는 그런 욕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며 “학폭위는 이를 재차 확인하지 않고 1시간 만에 심의를 종결했으며 사실 관계가 의심되는 진술이 있었는데도 소명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해 학생은 서면사과·특별교육·학급교체 조치를 받았고, 피해 학생 오군은 심리적 불안감에 시달리다 결국 자퇴하고 말았다.

학폭위 1회 이상 개최할 수 있어

이 같은 일을 피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미성년자인 학생의 진술 조사에 학부모가 동석해야 한다”며 “진술 조사 때 동석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밝히고, 진단서·심리소견서 등 피해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관련 서류를 반드시 준비하라”고 조언한다. 목격 학생의 진술 시에도 목격 학생 부모가 입회하에 조사가 이뤄지도록 요청하는 게 좋다.

일부 학교는 학폭위를 무조건 한 차례만 개최하도록 정해놓고 있지만 실제론 한 번만 열라는 관련 법 규정은 없다. 사안에 따라 여러 차례 개최할 수 있다. 학교폭력 전문 김용수 대표 변호사(김&이 합동법률사무소)는 “개별 단위 학교 차원에서 학폭위에 변호사·의사 등 전문가 위촉이 어렵고 위촉 위원끼리 여러 차례 시간을 맞춰 개최하기 어렵다 보니 많은 학교에서 학폭위를 한 번만 개최해 3~4개 사건을 동시에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며 “학폭위의 개최 횟수에 대한 법적인 제한은 없으며 필요에 따라 수 차례 개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학폭위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피해자는 각 시·도 학교폭력대책지역위원회에, 가해자는 교육청 학생징계위원회에 청구한다. 학폭위 결정 후 15일 이내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고, 청구 후 30일 이내에 결정이 내려진다. 재심의 결정에도 불복하면 행정소송이나 행정심판을 제기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학부모들은 학폭위에 미처 제출하지 못했던 피해 입증 관련 서류 및 피해자의 심리 상태에 대한 소견서 등을 제출할 수 있다. 김 변호사는 “증거 자료를 준비할 때는 폭행 사건의 경우 폭행을 당한 직후 피해상황을 담은 사진을, 왕따나 괴롭힘은 관련 카카오톡 메시지, 문자, e메일 등을 캡처한 사진을 확보해 놓으라”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학폭위의 구성뿐 아니라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에 대한 심리 치료 같은 사후 조치가 미흡한 것도 문제로 지적한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의 차민희 팀장은 “초등학생처럼 어린 피해 학생의 경우 정확한 심리 진단이 필수인데 지금의 학폭위 구조에서는 피해자 부모가 발품을 팔아 전문기관을 찾고 진단서를 끊어야 하는 등 피해자 가족의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학폭위에서 의결하는 서면사과·특별교육·전학 등 9개의 가해자 대상 조치에 대한 구체적인 양형 기준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김 변호사는 “비슷한 학교폭력 사건이 학교에 따라 학폭위의 심의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며 “9개 조치에 대한 구체적인 양형 기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Jeong.hyeon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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