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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들 원경스님이 바치는 박헌영 전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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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경기도 평택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 만기사(萬奇寺)의 주지 원경(圓鏡) 스님(62·속명은 박병삼).

고려시대 철불(鐵佛)과 약수를 비롯해 ‘만가지 기이한 것’이 있다는 ‘만기사’에서 원경 스님이야말로 가장 기이하다면 기이한 대상이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박헌영(1900~1956)이 그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남한에서는 ‘빨갱이’, 북한에서는 ‘종파분자’로 불렸던 아버지 박헌영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일에 몰두해 있다. 바로 ‘박헌영 전집’(모두 9권)을 펴내는 일이다.

지난 92년 이래 지금까지 10여 년간 전집 발간을 위한 자료 수집·정리는 물론 마무리 색인 작업까지 모두 마쳐 디스켓에 담아 놓았다.(편집자)

전집엔 '세계와 조선' 등 박헌영의 저서와 논문을 발굴해 수록한 것을 비롯해 공판기록.인터뷰, 그리고 러시아와 북한의 자료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와 함께 박헌영이 소련에 망명한 후 28년부터 32년까지 4년간 국제 레닌학교를 다니면서 기록한 학습 노트도 찾아내 수록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 강좌'를 수강하며 영어로 기록한 이 노트의 원본은 러시아에 사는 박헌영의 딸 박 비비안나(75)가 기증한 것이다. 자료를 수집하고 해제를 쓰는 데 모두 1백20명의 근현대사 연구자들이 동원됐다. 작업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원경 스님이 댔다.

선뜻 나서는 출판사가 없어 출간 이 미뤄지는 가운데 이 작업에 함께 참여한 임경석(45.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박사가 자신이 '박헌영 전집'에서 맡은 연보(年譜) 만을 묶어 최근 '박헌영의 생애-박헌영 연보 1900~1956'(여강출판사)이란 이름으로 펴냈다.

원경 스님의 양해를 얻어 별도로 먼저 출간된 이 책은 '박헌영 전집'아홉 권 가운데에도 한 권으로 실릴 예정이다.

'박헌영의 생애'는 시기별 사건을 단순히 나열 만한 책이 아니라, 매 시기의 행적마다 그에 대한 근거 자료를 제시하며 해설한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임박사는 "구 소련의 코민테른 자료를 포함해 지금까지 박헌영에 대해 구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모두 참고했다"면서 "코민테른 자료를 통해 해방 직후 남한에서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미군정 사령관인 하지 중장과 여러 차례 만나 당시의 시국을 논의한 사실 등은 새롭게 공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심훈과 경기고 동창이기도 한 박헌영은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사회주의 그룹에 가담했다. 심훈이 남긴 시 '박군의 얼굴'의 주인공 박군이 바로 박헌영이다.

그는 해방 직후 재건한 조선공산당의 당수를 지냈고, 46년 월북후 김일성의 정치적 라이벌로 맞서다가 한국전쟁 후 '미국의 스파이''공화국 전복을 위한 정변 음모'혐의를 받고 56년 처형됐다.

이번에 공개되는 기록을 보면, 미군정청의 시책에 조선공산당이 협력해 줄 것을 당부하는 하지 중장에게 박헌영은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한국의 해방이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원조에 의해 달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미군정청과 긴밀한 우호협력을 지향한다"면서 "군정청 사업에 활용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들이 많다. 이 같은 상황에서 무조건 지지만 할 수는 없다 "는 것이다.

원경 스님은 박헌영과 그의 둘째부인 정순년 사이에서 41년에 태어났다. 그가 불문에 귀의한 것은 10세 때인 50년. 고아가 돼 배를 곯고 있던 그를, 아버지의 측근이었던 한산(寒山) 스님이 데리고 다니게 되면서 결국 그도 머리를 깎았다.

한산 스님은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가 스님이 된 사람으로, 원경 스님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전해주며 돌봐 주다가 68년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원경 스님은 냉전이 해체된 92년 모스크바를 방문해 이복 누이 박 비비안나를 만난 일을 잊지 못한다. 박헌영과 그의 첫 부인 주세죽 사이에서 태어나 평생 소련에서 발레리나로 살아 온 누나는 한국말을 못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 부둥켜 안고 밤을 지새웠고, 누이가 보관해 오던 관련 자료와 사진 등을 모두 건네 받아 전집에 포함시켰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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