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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유산]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져라, 그래야 아침 일찍 눈도 떠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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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박사’ 윤무부 교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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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무부 교수는 집에 있을 때도 간단한 장비를 챙겨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새를 보기 위해서다. 수십 년간 같은 길을 걸어온 아들에게는 “부지런하고 목표 의식이 있어야 남들이 못 보는 새를 보고 더 좋은 연구를 한다”고 가르쳤다.

‘새 여행’ 함께하던 아이, 지금 나와 같은 길 걸어
민들레는 왜 솜털이 나는지, 왜 항상 노란 색인지
아이 질문 모른다 넘기지 말고 창의적인 답변을

아들이 유학 떠날 땐 10년간 돌아오지 마라 조건
공부든 영어든 뭐든 성공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
원망과 고마움은 종이 한 장 차이…매 순간 감사

‘새 박사’ 윤무부(75). 전 세계를 누비며 새를 연구한다.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는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새를 보러 다닌 아들은 스무 살이 되자 아버지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택했다. 아버지는 현재 경희대 명예교수, 아들은 한국교원대 윤종민(42) 박사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았다. 새를 좋아하고, 열정적이며 끈질긴 성격을 가졌다.

그의 수업 듣던 아들도 … 부자 새 박사

지난 4일 오후 4시, 조류학자 윤무부 교수가 사는 서울 휘경동 아파트를 찾았다. 문이 열리자 윤 교수의 아내 김정애씨가 환한 미소로 기자를 맞았다. 윤 교수는 10년 전 찾아온 뇌경색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아직 거동이 불편하다. 윤 교수는 방송 편집 장비로 가득 채워진 거실에 앉아 있었다.

윤 교수 집에는 어디든 새가 있었다. 새를 찍은 액자, 새 기념품 등이 집안 곳곳에 놓여 있었고, TV 스크린에선 새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벽에는 한 청년이 촬영 장비를 짊어지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노트북 광고의 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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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민씨는 대학에 다닐 때 윤 교수의 조교로 일했다. 부자는 야외에서 새를 촬영하거나 소리를 녹음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얘가 우리 아들 종민이에요. 잘 생겼지?” 덤덤한 말투였지만 아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사진 속 윤종민씨는 아버지가 졸업한 경희대에서 아버지와 같은 생물학을 전공하고 미국 미시간대와 콜로라도주립대에서 생물학 석·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교원대 황새생태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아들 종민씨는 아버지가 하는 강의를 들으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수강 신청을 못한 경우에도 아버지의 강의실에 슬쩍 들어와 맨 앞줄에 앉았다. 윤 교수는 “그런 아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던 게 벌써 20년 전 일”이라며 웃었다.

 
남들과 다르게, 똑같이 하면 경쟁력 없어

윤 교수의 새에 대한 사랑은 경남 거제도 장승포에서 시작됐다. 윤 교수의 집은 바닷가 시골 마을에 있었다. 대문 열고 나가면 눈앞에 바로 바다가 펼쳐지는 곳이었다. 윤 교수의 아버지는 농사를 짓는 농부이자 고기 낚는 어부였고, 집안에선 목수 역할도 했다.

윤 교수는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눈치 빠르고 심부름 잘하는 넷째 아들을 언제나 흐뭇하게 바라봤다.

어린 소년에게 최고의 장난감은 바닷가 새떼였다.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며 저 새는 어디로 가는 걸까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고, 바닷가에 앉아 있는 새를 쫓아다니며 놀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산과 들로 데리고 다니며 새를 보여주곤 했다. 논병아리·갈매기·물오리 같은 새 이름도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공부 못하기로 소문났던 소년이지만 새 이름만큼은 척척 외웠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이해해 주는 친구이자 멘토였다. “열 살 때부터 새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보였다고 해요. 그걸 유일하게 이해하고 지지해 준 게 바로 아버지였고요.”

눈치 빠르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점이 아들 윤 교수는 아버지와 닮았다. 아버지는 ‘바보처럼 부지런하기만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성취하려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아침 일찍 눈도 떠지는 거라고 했다. “진짜 교육은 강요하는 게 아니라 왜 그걸 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죠.”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법도 아버지에게 배웠다. 남들과 똑같이 하면 경쟁력이 없다고 했다.

윤 교수는 학창 시절 제일 먼저 등교해 화장실 청소를 했다. 시간이 남아 여자화장실 청소까지 하니 교사들이 처음엔 이상한 눈초리로 봤지만 나중에는 모두의 칭찬을 받았다. 윤 교수는 그때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려면 사소한 것부터 노력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손해 봐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고 가르치셨어요. 그건 제 평생 철학이 됐죠. 아들에게도 항상 강조하는 내용이에요.”

아들이 학문으로 성공하기 바랐던 아버지는 어린 윤 교수를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6·25 전쟁 직후 부자는 미군 부대 전용 야간열차를 탔고, 아들은 서울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윤 교수가 한영고에서 3년, 경희대에서 4년 공부하는 동안 어머니와 누나는 주말마다 번갈아들러 밥을 짓고 청소를 해주고 갔다.

 
비싼 사교육이 좋은 교육만은 아냐

자신이 ‘땅딸막하고 볼품없다’고 생각했던 윤 교수는 ‘미인과 결혼하겠다’는 꿈을 꿨다. 윤 교수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내가 못생겼으니 아내라도 미인이라야 아이들에게 좀 덜 미안할 것 같았다”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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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아내와 정림·종민 남매와 찍은 가족 사진.

우연히 아내의 사진을 본 윤 교수는 상사병을 앓으며 1년 동안 매일 연애편지를 보냈지만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아내가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러 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결국 첫 데이트를 했다. 친척 동생 차를 빌려 드라이브를 하고, 영화를 보면서 진지하게 설득했다. “지금 나는 연구생이지만 곧 교수가 될 거다. 나를 믿어달라”는 윤 교수의 구애에 결국 아내 김정애씨도 마음을 열었다. 장인도 처음엔 반대했지만, 결국 두 사람의 의지에 결혼을 승낙했다.

윤 교수가 꿈에 그리던 미인 아내를 얻은 덕분일까. 아들 종민씨는 노트북 광고 모델로 기용될 만큼 키 크고 잘생긴 청년으로 자랐다. 어린 시절 종민씨는 윤 교수가 떠나는 ‘새 여행’의 동반자였다. 새로운 새 서식지가 발견되거나 희귀 새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버지는 카메라를 들고 바람같이 달려갔고, 종민씨는 그런 아버지와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어린 시절의 그 여행 때문에 가창오리, 휴전선 두루미, 예산 황새, 군산 태극오리 같은 새들의 이름을 종민씨는 구구단처럼 쉽게 외웠다.

가족들 사이에 마찰이나 갈등이 있을 때도 여행을 함께하면서 풀었다. “우리 가족은 불만이나 다툼거리가 있을 때면 다 같이 새를 보러 갔어요. 화가 나서 뿌루퉁하다가도 바깥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자연스럽게 풀리곤 했죠.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녀들과 여행을 많이 다니라고 합니다. 공부하라는 잔소리보다 스스로 동기를 찾아 공부하게 하는 게 좋습니다.”

아이들의 엉뚱한 질문도 그냥 넘기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아이들 질문은 어른보다 날카롭습니다. 가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게 되죠. 그럴 때 심호흡을 하고 아이가 관심 갖는 내용부터 차근차근 얘기해 줘야 합니다.”

두 아들은 민들레가 왜 봄에 흰 솜털이 나는지, 꽃은 왜 몇 년이 지나도 늘 처음처럼 노란색인지를 물었다. 그는 잘 모르는 질문이 나올 때도 그냥 모른다고 하지 않고 ‘봄에 찾아오는 추위가 더 무섭다’거나, ‘꽃도 아빠랑 엄마를 닮는다’는 식의 창의적 대답을 해줬다. 늘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아이들을 대했다.

“유명한 학교에서 비싼 사교육을 받게 해주는 게 좋은 교육은 아닙니다. 나 역시 아버지께서 해줬던 이야기를 내가 받은 최고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해야 내려가는 길이 가파르지 않아

윤 교수는 아들이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건 내심 원하지 않았다. 대학이나 전공을 선택할 때도 관여하지 않았다. 새를 연구하는 게 외롭고 긴 여정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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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막을 치고 며칠이고 밤을 새며 새를 기다리는 윤 교수.

“새는 인간의 삶과 전혀 다른 시계에 따라 움직이죠. 사람에 맞추면 새를 알 수 없어요.” 새벽에 짐을 싸서 떠나기도 하고, 기약 없이 떠나 일주일이나 한 달씩 돌아오지 못하는 게 새 연구다. “열정을 갖고 결정한 길도 중도에 하차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아들에게 그 길을 권할 수 있겠느냐”는 게 윤 교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대학, 같은 전공을 선택했다. 학교 다닐 땐 아버지의 전속 조교를 자처했다. 덕분에 대학 시절 내내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데이트하는 건 꿈도 못 꿨다. 종민씨는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렇게까지 내 시간이 없을 줄은 몰랐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아들 종민씨가 유학을 결심했을 때 윤 교수는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라” 했다. 그 길로 1억2000만원대 아파트를 팔아 아들 교육비를 마련했다. 가끔 있던 광고 수익료도 모두 아들 교육비로 쓰기 위해 모아뒀다.

경희대 불문과를 졸업한 큰딸 정림씨가 미국 캘리포니아 UCLA에서 의학통계를 공부하게 해달라고 했을 때도 단번에 허락했다. 아들은 미시간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평소 자녀 교육에 관여한 적이 없는 윤 교수가 그때만큼은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학비를 대줄 테니 10년 동안 돌아오지 말라”는 거였다. 10년이라고 한 건 뭐든 하나를 해서 제대로 성공하려면 그 이하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석봉 어머니도 아들에게 10년 동안 산에서 글을 읽으라고 했다지요. 공부든, 영어든, 네트워크든 5년으로는 어림도 없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종민씨에게 ‘교수님과 가까이 지내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틈만 나면 논문을 많이 읽어라,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더 많은 새를 알 수 있다’는 등의 조언을 했다. 윤 교수는 아들이 해외에서 자신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누렸으면 했다.

콜로라도 주립대에서 박사를 취득하고 돌아온 종민씨는 한국교원대 황새생태연구원에 소속돼 교편을 잡았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증식·복원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2016년 환경부장관상도 탔다. 그때 아버지는 축하 인사와 함께 “쉽게 얻어지는 건 없다”며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조언했다. 남들보다 빨리 성취할수록 겸손해야 내려가는 길이 가파르지 않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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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경색이 완치되지 않아 손이 불편한 윤 교수를 대신해 아내 김정애씨가 윤 교수의 말을 받아 편지로 썼다.

가족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고마울 뿐

미국에서 새를 공부한 아들은 국내파 새 박사인 아버지를 많이 돕는다. 아들이 외국 논문을 술술 읽고 외국 학회에서 유창하게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서 윤 교수는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아들이 대신해 주는 것 같아 뿌듯하다. 이름이 알쏭달쏭한 새를 만날 때면 아들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기도 한다.

같은 분야를 다루는 최고 전문가가 한집에 둘이다 보니 가끔 이견이 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땐 치열하게 토론을 한다. 토론하고 나면 단순한 부자지간이나 사제지간을 떠나 새를 대하는 평생 동료를 얻은 기분이 든다. 요즘도 두 사람은 만나면 새 이야기를 주로 한다.

“요즘엔 내가 평생 찍은 새 사진, 영상, 새 소리 녹음 파일들을 모아서 온라인 새 박물관을 만들자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는 새가 360종 있는데 그중 300여 종이 5개국을 거쳐 호주까지 이동합니다. 그 다섯 나라가 어디인지, 첫 번째 들른 나라에서 새는 뭘 하고 어떻게 먹이를 찾는지 그 과정을 정리해서 보여주려고 합니다. 내가 시작하고 아들이 완수할 과제예요.”

뇌경색 후유증이 있지만 윤 교수는 여전히 새를 찾아다닌다. 약간의 불편함이 그의 새에 대한 애정을 꺾지는 못한다. 뇌경색이 찾아온 건 2006년 휴전선 근처에 두루미를 관찰하러 갔을 때였다. 오른쪽이 마비돼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윤 교수는 뇌경색 판정을 받고 일주일 후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떠올렸다. 윤 교수도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세상이 끝난 기분이었죠. 죽는 것보다 다시 새를 보러 나갈 수 없다는 게 가장 무서웠어요.”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죽을 힘을 다해 재활 치료를 했다. 혀 근육 운동, 팔 운동을 하며 몸이 굳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2년 동안 누워서 왼발로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는 연습을 머릿속으로 했어요. 지금은 왼발로 운전도 합니다.”

윤 교수는 그때 자기를 도와준 건 ‘천사 아내’라고 말했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유머러스했고, 따뜻하게 그를 지켜봐줬다. 윤 교수는 “아이들이 인내심 많고 늘 성실한 이유는 아마도 나 때문이 아니라 제 엄마에게 배운 성품일 것”이라고 말했다.

윤 교수 집 거실 벽에는 ‘탓하지 말고 그러려니 생각하며 사는 날까지 삽시다’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있다.

“원망과 고마움은 종이 한 장 차이더군요. 지금은 가족과 함께하는 매 순간과 아들과 새를 보러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게 고마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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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무부 프로필

1941년 거제도 장승포 출생
 60년 한영고 졸업
 67년 경희대 생물학 학사
 69년 경희대 대학원 생물학 석사
 93년 자랑스런 서울시민 100인 선정
 95년 한국교원대 대학원 생물교육학 박사
 97년 제1회 환경상 환경보전부문 우수상 수상
2006년~현재 경희대 생물학과 명예교수

○ 인생의 롤모델: 국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새를 연구해 조류학자들에게 귀감이 된 원병오 경희대 명예교수
○ 내 인생을 바꾼 책: 사물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는 법을 알려준 J.H.파브르의 『파브르 곤충기』
○ 좌우명: 어제를 생각하고 내일을 계획하며 살자

글=이영지 기자 lee.youngji@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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