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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억대 전재산을 꽃뱀에게 빼앗기고 세상 떠난 80대 노인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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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토]

치매를 앓던 80대가 "여생을 돌봐주겠다"며 접근한 꽃뱀 일당에게 서울 종로구 자택과 경기도 광주의 토지 등 90억원대 전 재산을 빼앗겼다. 경찰은 이들을 검거했지만 재력가는 자신이 사기당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억울해 하다 세상을 떠났다.

재력가 K(83)씨가 꽃뱀인 이모(62·여)씨를 만난 것은 2013년 7월. K씨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접근해 “나는 대통령의 친구다. 대법원 판결을 뒤집어 줄 수 있다”고 환심을 샀다. 그러면서 이씨는 자신이 ‘OO병원 이사장’이라고 속였다. 이씨는 K씨의 집을 자주 찾아 말벗이 됐다. K씨도 그런 이씨가 싫지 않았다.

마음을 얻은 것으로 판단한 이씨는 본격적인 재산 빼앗기에 나섰다. 이씨는 2013년 9월 상속받은 재산 때문에 형제들과 다툼을 벌이고 있던 K씨에게 ‘유류분 청구 소송’ 얘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재산보호를 위해 소송비용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치매 때문에 상황판단이 흐린 K씨는 이씨를 철저하게 믿었다. “모든 재산을 이씨에게 양도한다”는 유언장과 양도증서까지 만드는데 동의했다. 이씨는 이를 근거로 같은 해 11월부터 K씨 소유의 미국펀드 2개를 미국 현지에 가서 매각하고 대금을 빼돌렸다.

이씨의 범죄행각은 갈수록 대범해졌다. K씨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여생을 돌봐주겠다”고 꾀어 K씨와 2014년 1월 혼인신고를 했다. 이후 이씨는 오씨 등과 함께 같은 해 9월까지 10차례에 걸쳐 K씨의 서울 종로구 자택과 토지, 충북 진천의 토지, 경기 광주의 토지 등 90억원대 부동산을 처분했다. 이씨 등 3명은 이 대가로 59억 원을 받아 챙겼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K씨가 미국에 있는 가족들과 연락하지 못하도록 주소를 옮기고 휴대전화번호를 다섯 차례나 바꾸는 등 K씨를 가족들과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이같은 방법으로 K씨의 재산을 모두 빼앗은 이씨는 2014년 8월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2개월 뒤인 같은 해 10월 법원으로부터 이혼조정 결정이 내려지자 이씨는 K씨 곁을 떠났다.

뒤늦게 이같은 소식을 접한 K씨의 가족들은 이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했지만 친족간 재산죄의 형을 면제하는 ‘친족상도례’ 규정에 따라 소송을 내더라도 패소가 불가피하다는 소식에 발만 동동 굴렀다. 경찰에 사건이 알려지면서 사기 혐의로 이씨가 붙잡혔다.

경기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이씨를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고 15일 밝혔다. 또 이씨와 짜고 돈을 빼앗은 오모(61)씨 등 2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이씨와 또 다른 공범 이모(77)씨가 과거부터 부부행세를 하며 사기행각을 벌여왔다”며 “이들은 빼앗은 돈으로 서울 동대문의 아파트에서 호화롭게 생활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들이 조직적으로 사기행각을 벌인 점에 비춰 다른 범행이나 피해자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기로 했다.

수원=임명수 기자 lim.myoung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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