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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위한 공공미술 제 자리 찾아주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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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호 28면

김영중의 공공미술 ‘생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벽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새 사라져버리는 문화유산이나 건축물이 늘어난다. 도시 재개발이나 노후 주택의 증·개축이 새로운 반달리즘(vandalism)의 주범이다. 문화유산국민신탁·내셔널트러스트 등 민간단체 문화재 지킴이들이 안간힘을 써보지만 역부족인 듯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 본격화된 공공미술 가운데 푸대접을 받으며 잊혀져 버린 작품은 통계조차 잡히지 않는다.


이 분야의 개척자라 할 조각가 우호(又湖) 김영중(1926~2005)은 이런 현실에서 그나마 행복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옆에 설치된 횡보(橫步) 염상섭의 좌상이 그 하나다. 1996년 ‘문학의 해’를 맞아 우호가 제작해 종묘공원에 세웠던 횡보 조각은 2007년 삼청공원 약수터로 슬그머니 이전됐다. 유족과 시민들 탄원으로 2014년 4월 다시 대중 곁으로 돌아오기까지 소설가의 영혼을 기린 조각품은 제 구실을 못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후문 벽면에 자리한 부조(浮彫) ‘생산’도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았다. ‘생산’은 1961년 미국대외원조처(USOM)가 서울 세종대로에 세운 쌍둥이 건물을 위한 작품 공모에서 당선한 김영중의 초기 대표작이다. 현 주한 미국 대사관에 남아있는 부조 ‘평화’와 짝을 이룬 ‘생산’은 옛 문화체육관광부 청사의 로비 오른쪽 벽에 붙어있었으나 존재감 없이 방치된 상태였다. 이 건물이 2012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탈바꿈할 때 현장 관계자들은 시커멓게 먼지를 뒤집어 쓴 이 작품이 누구 것이고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어떻게 처리할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다행히 자료가 발견돼 ‘생산’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했다. 전북 익산에서 캔 대리석 12조각으로 구성된 부조는 벽체에서 분리해 콘크리트를 제거한 뒤 리노베이션 된 박물관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 가을의 수확 풍경을 탄탄한 조형력으로 장악한 조각가의 힘이 55년 세월을 뛰어넘는다.


김영중은 미술의 공공성 실천을 위한 법안인 ‘미술장식품법’을 발의하고 앞장서 뛴 활동가였다. 1982년 목포 유달산에 한국 최초의 조각공원을 조성했고, 86년에는 제주조각공원을 세웠다. 공공미술 연구자와 후학을 위해 ‘연희조형관’을 만들었으나 시대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조형관이 들어선 서울 연희동 이웃에 전두환·노태우 당시 대통령 사저가 있던 탓에 10년 넘게 보안 문제 등에 걸려 고전하다가 단 1회 전시를 끝으로 활동을 접어야 했다.


김영중이란 이름은 몰라도 우리는 곳곳에서 그의 작품을 자주 본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외벽의 ‘비천상’, 천안 독립기념관의 ‘불굴의 한국인상’ 등 시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곳에 그는 자신의 재능을 털어 넣었다. 그러는 사이에 개인전은 단 한 차례도 열지 못했다. 지난 11일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우호 김영중 평화행진곡’(5월 1일까지)은 사후에 열리는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정재숙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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