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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텍 필립·론진의 40년 시계 장인, 57세 늦깎이로 창업 열정 꽃 피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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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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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고의 워치메이커로 꼽히는 로저 드뷔. 그가 1995년 창업한 ‘로저드뷔’는 독보적인 기술과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짧은 기간에 명품 반열에 올랐다. [사진 로저드뷔]

명품 시계 중에는 창업자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쓰는 곳이 꽤 있다. 파텍 필립, 브레게, 바쉐론 콘스탄틴, 피아제, 예거 르쿨트르 같은 브랜드들은 동명의 시계 장인이 창업한 뒤 약 200~300년에 걸쳐 기술을 축적하며 명품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처럼 오랜 전통과 기술력으로 경쟁하는 고급 시계 업계에 ‘무서운 신인’이 하나 등장했다. 올해로 21세가 된 스위스 시계 브랜드 ‘로저드뷔’다.

[사람 속으로] ‘살아 있는 시계의 전설’ 로저 드뷔
젊은층에게 전통기술 가르쳐주고
혁신적 새 아이디어 얻어내 윈윈

1995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창업한 시계 장인 로저 드뷔(78)는 현존하는 최고(最高)이자 최고(最古)의 워치메이커로 꼽힌다. 브랜드 창업자가 여전히 생존해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드뷔는 ‘살아 있는 시계의 전설’로도 불린다. 그는 제네바의 시계제조학교를 졸업한 뒤 파텍 필립·론진 등에서 워치메이커로 일했으며, 오래된 시계를 복원하는 독자적인 작업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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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드뷔 시계는 전문 기술과 젊은 디자인이 훌륭한 균형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다. ① 기계식 시계의 오차를 줄이는 장치인 스프링밸런스를 4개 탑재한 ‘엑스칼리버 콰토르’. ② 고무 베젤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엑스칼리버 스파이더 스켈레톤 플라잉 투르비용’. ③ 카본 베젤 위에 보석을 세팅하는 기술을 처음 선보인 ‘블랙 벨벳’. ④ 에나멜 플레이트를 상감세공 기법으로 조각한 ‘블로섬 벨벳’. ⑤ 날짜창이 독특한 ‘벨벳 시크릿 하트’.

‘로저드뷔’ 브랜드는 2008년 리치먼드그룹에 편입됐다. 드뷔는 여전히 시계 개발 자문을 하면서 전문지식과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연초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고급시계박람회(SIHH)에서 그를 만났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브랜드를 만든 계기는.
“오랜 기간 워치메이커로 일하면서 쌓은 노하우와 경험을 총동원해 브랜드를 만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선택이라기보다는 운명이었다. 시계를 계속 만들되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인생을 건설적인 방법으로 정리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창업 당시 57세였다. 주저되지 않았나.
창업을 결정하기까지 거의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내 브랜드를 만든다는 것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적지 않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무브먼트 개발, 클래식 시계의 복원 등 40여 년 동안 내가 얻은 전문지식과 경험을 모두 브랜드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짧은 기간에 최고급 럭셔리 반열에 오른 비결은.
“초창기부터 지향점이 명확했다. 최상급 품질과 기술력, 모던한 디자인을 브랜드 정체성으로 정했다. 완벽한 퀄리티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전 제품이 제네바 실(제네바에서 생산되는 무브먼트와 시계 중 극소수의 최고 등급에만 주는 인증마크)을 받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신생 브랜드였지만 이미 브랜드 피라미드의 꼭짓점에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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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카펫을 테마로 꾸민 국제고급시계박람회장 안 부스. [사진 로저드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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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고급시계박람회 홍보물. [사진 로저드뷔]

SIHH 행사장 안 ‘로저드뷔’ 전시관은 할리우드의 영화제 시상식장으로 꾸며졌다. 24개의 계단을 따라 레드 카펫이 깔렸고 알렉산더 매퀸, 마틴 마르지엘라, 클로에 등 명품 디자이너의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이 둘러쌌다. 손목 위 ‘벨벳 컬렉션’ 시계가 제법 어울렸다.

‘로저드뷔’는 올해를 ‘벨벳 디바의 해’로 선포했다. 시계 신제품 10개 중 9개가 여성용이다. 태엽과 톱니바퀴, 스프링 같은 기계 장치의 움직임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식 시계는 오랜 기간 남자의 ‘로망’이었다. 시계업체들이 남성에 주력할 때 ‘로저드뷔’는 여성으로 눈을 돌렸다.

여성에게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지난 20여 년간 남성 시계에 집중했고, 무브먼트와 세밀한 테크닉에 총력을 기울여 하이엔드 부문에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이젠 여성에게 관심을 둘 만한 시점이 됐다. 여성 고객이 차지하는 의미가 점점 커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여성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 상승과 연관되나.
“그렇다. 여성은 과거보다 독립적이 돼 스스로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됐다. 더 이상 남편이나 애인의 시계가 아닌, 여성 자신만을 위한 시계를 원한다. 책임자의 위치에 올라간 여성이 많아졌고,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찾을 줄도 알게 됐다. 주얼리에만 관심 있던 여성들이 이젠 기계식 시계의 가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주요 제품 가격대가 6000만~8000만원인데, 비싼 이유는.
“걸맞은 가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 이 정도 고품격 퀄리티를 갖추기 위해서는 수많은 작업을 거쳐야 한다. 숙련된 장인이 필요하고, 제작 시간도 오래 걸린다. 무브먼트 마감 작업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아틀리에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수많은 장인의 세밀한 손길을 거친 작업이 이뤄진다. 이런 수작업 때문에 고가일 수밖에 없다.”
약 60년간 시계산업에 종사하면서 좋은 시절과 나쁜 시절을 모두 겪었을 텐데.
“젊을 때는 걱정할 게 없었다. 그저 산업의 흐름을 따라가면 됐다. 내 소유의 매뉴팩처(시계 제조 공장)도 없었으니 지금과 같은 책임감도 없었다. 업계 흐름이 좋기도, 나쁘기도 했고 나 또한 잘될 때도, 덜 될 때도 있었다. 그동안 시계산업은 변화하는 상황에 잘 적응했고 굴곡도 깊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좋을 때와 나쁠 때의 편차가 너무 심해졌다.”
1970년대에 배터리 충전식 ‘쿼츠’ 시계가 등장해 기계식 시계업계가 타격을 입었는데.
“쿼츠 사태가 왔을 때 기계식 시계의 시대는 끝났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 깊은 곳에 전통적인 워치메이킹은 계속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 지속할 수 있을지 방법은 알지 못했지만. 내 낙천적인 성격도 한몫했다. ”
그래서 어떻게 했나.
“쿼츠가 득세하면서 시계 장인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갔다. 고급 시계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공유하고 전통을 잃지 않아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해 사람들을 모아 오래된 시계의 복원작업을 했다. 그러다 90년대 이후 붐이 다시 찾아왔다. 크로노그래프(짧은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기구) 등 기계식 시계의 아름다움이 다시 부각됐고 산업이 활기를 찾았다.”
독보적인 기술력과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정평이 났는데,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비결은.
“젊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낸다. 그들이 창의성을 완전히 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초창기부터 젊은 워치메이커나 디자이너를 많이 고용했다. 이들이 상상력과 창의성을 자유롭게 펼치게 해 최상의 능력을 끌어냈다.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이런 모험의 세계를 함께할 수 있게 됐다.”
젊은이들은 경험이 부족하지 않나.
“내가 한 것은 ‘페어 트레이드(fair trade·공정무역)’ 방식이다. 내가 가진 전문지식을 전수해 그들을 일정 수준으로 훈련하고, 그들로부터는 젊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윈윈(win- win) 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워치메이커가 되고 싶었나.
“10세 때 마을 첨탑의 시계 장치를 관리하는 일을 도우면서 시계와 사랑에 빠졌다.”
성공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조언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담아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건 굳건한 정신과 마음을 담고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일이란 진정한 노력과 가슴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잊지 마라. 그 밖의 모든 것은 그저 부수적일 뿐이다. 나의 모든 사랑과 열정을 이 브랜드에 쏟았다.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네’라는 시 구절을 좋아한다.”

제네바=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S BOX] 고무 소재 시계 테두리에 다이아몬드 세팅, 2년 걸려 기술 개발

‘로저드뷔’ 가 명품 시계업계에 후발 주자로 뛰어들어 단숨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콘텐트, 즉 혁신적인 디자인과 뛰어난 기술력으로 차별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로저드뷔는 32개의 자체 무브먼트(시계 작동장치)를 제작해 보유하고 있다. 수백년 된 브랜드 중에도 자사 무브먼트를 40~50개 보유한 경우가 많은걸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 다. 헤어스프링 같은 작은 부품 하나까지 시계의 모든 구성 요소를 자체 제작한다.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 중에서도 흔치 않다. 최고급 워치메이킹 인증인 ‘제네바 실’을 전 제품에서 받은 브랜드는 로저드뷔가 유일하다.

이런 연구개발(R&D) 덕분에 시계업계 최초로 선보인 기술을 여럿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고무 소재의 베젤(시계 테두리)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시계 ‘엑스칼리버 스파이더 스켈레톤 플라잉 투르비용’을 선보였다. 단단한 보석을 고무 몰딩에 세팅하는 작업은 정확한 두께로 플라스틱을 변형하는 숙련된 기술을 요한다. 연구 기간만 2년이 걸렸다. 올해는 여성용 시계 ‘블랙 벨벳’에서 카본 소재 베젤에 보석을 세팅하는 기술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백금보다 2.5배 가벼운 카본은 편안한 착용감 때문에 그동안 남자 시계에는 널리 사용됐다. 하지만 거친 느낌 때문에 여성 시계에는 잘 쓰지 않았는데, 그 위에 보석을 세팅하는 기술을 개발해 카본을 화려하게 변신시켰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스켈레톤 디자인에도 로저드뷔가 한 획을 그었다. 전통적인 스켈레톤 모델은 때로는 관련 없어 보이는 부품과 장식을 복잡하게 드러내기만 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반면 로저드뷔는 스켈레톤의 투시성과 가독성을 높이면서 부품과 골조의 구조적 아름다움을 돋보이도록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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