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의 102 우변 침투, 승부 가른 'AI의 한 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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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후 4시30분 이세돌(33) 9단이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바둑판 위에 돌을 던졌다. 계가(計家·집계산)를 할 필요도 없이 패배를 인정한다는 뜻. 대국을 시작한 지 세 시간 반, 186수 만의 불계패였다. 침범할 수 없는 인간 영역으로 여겨졌던 바둑에서 세계 최고수가 컴퓨터 인공지능(AI)에 패하는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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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기 중 첫 번째 대국인 이날 이 9단과 알파고 간의 맞대결은 강도 높은 긴장감 속에 치러졌다. 손이 없는 구글의 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를 대신해 개발사인 구글 딥마인드의 아자 황(아마 6단) 선임연구원이 이 9단 앞에 마주 앉았다. 돌을 가린 결과 이 9단의 흑. 중국식 룰에 따라 덤이 7집 반, 반면으로 집 수에서 그 이상 앞서야 이 9단이 이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흑 이세돌·백 알파고 대국 분석
흑의 초반 변칙에 백은 강수 압박
백, 중반 불리해지자 승부수 던져
흑은 우하귀 121~129수 패착

이 9단이 첫 착점으로 우상귀 소목을 선택하자 알파고는 뜸을 들였다. 1분30초 만에 좌상귀 화점으로 응수했다.

이 9단은 대국 초반부터 변화를 모색했다. 평소에 잘 두지 않던 변칙적인 수를 잇따라 시도했다. 하지만 알파고는 예상보다 강했다. 흔들리지 않고 강수로 치고 나왔다. 흑돌의 약한 고리를 공략해 연결을 끊은 다음 약해진 돌들을 몰아붙이며 이 9단을 압박했다. 계산 착오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박영훈 9단은 “초반 이세돌 9단의 변칙 포석이 먹히지 않고 알파고가 부분적인 수읽기에서 이득을 보면서 알파고 쪽으로 바둑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평했다.

중반에 접어들며 이 9단이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우상귀에서 중앙 쪽으로 뻗어 나온 알파고의 백돌 무리를 공격하면서 중앙에 세력을 쌓았다. 좌하귀 화점에 놓인 알파고의 백 한 점을 양쪽에서 공략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 공격에서 좌중앙에 큰 집을 확보하면서 형세가 이 9단에게 유리하게 흘렀다.

이 장면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알파고의 승부수가 나왔다. 102의 우변 침투(총보 빨간 원). 경기가 끝난 후 박치문 한국기원 부총재는 “이 수가 날카로웠다”고 평했다. 자체로 큰 수는 아니지만 아직 땅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우하귀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미묘한 한 수라는 것. “이세돌의 응수가 쉽지 않았고 알파고가 그런 수를 둘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했다.

승부는 결국 우하귀에서 갈렸다. 방심한 탓일까. 121에서 129수에 이르기까지 이 9단의 착수가 모두 느슨했다. 마땅히 몇 집이라도 냈어야 할 자리에서 소득 없이 헛손질하는 사이 선수를 챙긴 알파고는 상변으로 달려가 추가 이득까지 취했다. 이후 판세를 뒤집을 승부처는 없었다. 어떻게 해도 덤을 능가하는 집을 남길 수 없다고 판단한 이 9단은 결국 돌을 던졌다. 각자 2시간씩 주어지는 제한시간 중 이 9단은 28분28초, 알파고는 5분30초를 남겨둔 상황이었다. 알파고가 상대적으로 시간을 많이 쓰며 신중하게 둔 반면 이 9단은 흐름이 좋았던 중반과 패색이 짙어진 종반, 비교적 빠르게 수를 뒀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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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9단이 실수했듯 알파고도 경기력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사람처럼 실수를 저질렀다. 좌하귀에서 아마 고수 수준에서도 잘 나오지 않는 어이없는 수를 둬 한때 바둑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지난해 10월 유럽 챔피언 판후이 2단을 이길 때보다 훨씬 강력해졌다는 평가다. 송태곤 9단은 “초반이 약했던 당시 약점을 보완한 것 같다. 프로기사 중에서도 최강자 실력”이라고 평했다.

중앙일보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대국을 온라인 중계한 아마 5단 김태우씨는 “이 9단의 초반 변칙 포석에 알파고가 강수로 응수했다. 돌의 흐름이 사람 바둑처럼 자연스러웠다”고 평했다. 또 “판세가 불리하다고 느끼자 사람처럼 판을 흔드는 승부수를 던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박치문 부총재는 “알파고의 기풍은 전성기의 이창호처럼 화려하지 않고 밋밋한 편이다. 하지만 철저하게 승부에서 이기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막판에 이 9단을 더 몰아칠 수 있었는데도 승리가 확실하다고 판단했는지 무리를 하려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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