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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고물들 위한 쉼터 만들어 … 아버지는 응암동 물질고아원 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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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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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성찬경 시인의 추모전에서 재현한 그의 집 ‘물질고아원’ 마당. 장남 성기완씨가 ‘물질고아’ 곁에 누웠다.

고 성찬경(1930~2013) 시인의 3주기 추모전 ‘응암동 물질고아원’은 비범했다. 지난달 26일, 그의 기일에 맞춰 시작한 전시였다. 고물 오브제가 잔뜩 있는 전시장 곳곳에서 이야기가 넘쳐 흘렀다. 그는 3년 전 서울 인사동 백악 미술관에서 서예 전시를 보다 쓰러졌고, 영면했다.

가수 성기완 등 5남매 추모전 열어
나사·궤짝 등 고물 100여 점 전시

3주기를 맞아 성기완(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 멤버이자 시인), 지휘자 성기선, 시나리오 작가 성기영 등 오남매는 아버지의 추모전이자 첫 전시회를 그 자리에서 열었다. 전시장 1·2층에는 시인이 살아 생전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던 고물로 만든 오브제, 실용품, 액자 등 100여 점이 전시됐다. 길에서 주운 나사, 파이프, 구리선, 사과 궤짝, 시바스 리갈 포장 상자가 풍차와 싸우는 돈키호테로, 스탠드로, 학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응암동 물질고아원’ 원장이셨어요.” 고아원 원장을 자처한 아버지 덕에 동네에서 고아로 오해받기도 했던 장남 성기완씨를 4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이번 전시를 총괄한 그는 2층 전시장 한 편, 녹슨 고물이 잔뜩 모여 있는 지점에서 멈춰섰다. “재개발되기 전까지 살았던 서울 응암동 집 마당의 일부를 재현한 것”이라고 했다.

영문학과(성균관대) 교수였던 성찬경 시인은 버려진 물질을 거두는 데 평생을 쏟았다. 해외에 나가도 나사를 주워왔다. 기행 같은 일상은 TV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에 소개될 정도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비범하고 독창적인 사람’이었다.

“일종의 속죄행위라고 하셨어요. 사람들이 물질을 학대하고 자꾸 버리는데 나 한 사람이라도 속죄하는 의미로 물질에 쉴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하셨죠. 요즘에서야 많이 이야기하는 리사이클링을 시대를 한참 앞서 하셨어요. 인권선언처럼 물권선언을 하시고 시를 쓰시기도 하셨죠.”

고물로 무언가를 만들었다 해서 대충 만든 게 아니었다. 치열한 구상과 수없이 많은 드로잉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었다. 그렇게 빈틈없던 아버지와 빈틈 많아서 아버지에게 혼나기 일쑤였다는 장남은 추모전에서 ‘일상 예술’을 함께 말했다. 장남도 왼 손목에 기타, 오른 손목에 시 문신을 하고서 뮤지션이자 시인으로 살고 있다.

“우연히 어느 순간 아버지를 따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버지는 예술과 생활의 거리를 안 두셨죠. 저도 ‘예술은 앉은 자리에서’라는 말을 종종 해요. 예술이 꼭 특별한 곳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었던 성찬경 시인은 1956년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했다. 단어 수를 최소화해 의미를 극대화하는 ‘밀핵시’라는 시 이론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림과 서예와 바느질과 물질고아를 사랑하는 전방위 예술가였다. 전시는 9일까지 열린다.

글·사진=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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