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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정 쳐낸 김종인, 다시 ‘햇볕’ 들고 나온 안철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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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호 6 면

지난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부실부채 탕감 퍼포먼스에 참석한 김종인 더민주 대표(위 사진 왼쪽).

아래는 25일 서울 마포구 당사에서 열린 선거대책위원회의에 참석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오른쪽)와 김한길 공동선대위원장. 박종근 기자, [뉴시스]

“척추가 바로 서지 않으면 걸음과 행보가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기호 3번(국민의당 후보들)이 김대중·노무현의 적통이다.”(정동영 전 의원, 22일 광주 예비후보 간담회에서) “더불어민주당(더민주)에서 ‘호남불가론’은 사라진 용어가 될 것이다. 항상 우리의 출발은 광주였다.”(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 대표, 25일 발표한 ‘광주선언’ 중에서)


더민주와 국민의당 사이에 불붙은 ‘대표 야당 경쟁’의 화두는 다시 ‘호남’이다. 당초 국민의당이 ‘중도’를 표방하며 이념적 분화에 따른 헤쳐 모여의 가능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김종인의 더민주가 오른쪽으로, 천정배와 정동영을 끌어안은 국민의당이 왼쪽으로 내달리면서 노선과 색깔의 차이는 체감하기 어려워졌다. 대신 김종인 대표는 호남의 배척을 받는 친노 세력 견제로, 국민의당은 호남 정서를 파고들 중진 정치인 영입으로 호남 대전의 승부수를 던졌다.


“여기가 무슨 국보위냐. 누구 찍어서 나가라면 나가고….” 최재성 전 더민주 총무본부장은 격앙돼 있었다. 26일 중앙SUNDAY와의 통화에서 그는 “김종인 대표를 두 번 만나 표창원(전 경찰대 교수)·김병관(웹젠 의장)·양향자(전 삼성전자 상무) 등에 대한 비례대표 공천을 건의했는데 김 대표는 그냥 듣기만 하고 한 명도 안 받았다. (비례대표 전체를) 100% 자기 사람들로 채우려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표의 최측근으로 인재영입을 주도한 그는 김 대표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전력까지 언급하며 흥분했다. 친노(친노무현)그룹은 문 전 대표 시절 영입한 인사들이 새 지도부에 의해 ‘찬밥 취급’을 받고 있다며 부글부글 끓었다. 최 전 본부장은 친노로 분류되는 강기정 의원 지역구(광주 북갑)의 전략공천 발표에 대해서도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지지율만 가지고 강 의원을 자르려면 광주 다른 지역구나 수도권에서도 전략공천을 내세워야 한다”고 했다. 최 전 본부장과 강 의원은 친노 중에서도 정세균계로 함께 분류된다.


김 대표의 행보엔 친노에 비판적인 호남의 마음을 얻기 위한 뜻이 담겨 있다는 분석이다. 그는 25일 광주선언에서 “더민주가 시끄러운 소수의 정당이 돼 소리 없는 다수의 목소리를 외면했다”고 했다. 더민주에 합류한 후 이날 두 번째로 광주를 찾은 김 대표는 “호남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호남의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인들이 대권 주자로 성장할 것입니다”라며 잔뜩 몸을 낮췄다. 광주의 숙원인 자동차 100만 대 생산기지 조성 공약도 내걸었다. 29일에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3남 홍걸씨를 ‘통합과 수권비전특위(가칭)’ 위원장에 임명한다. 야권의 적통이 더민주에 있음을 부각하려는 행보다.


김 대표 비서실 관계자는 “그간 당내에서 제기된 ‘호남불가론(호남 출신으론 대선 승리가 어렵다는 논리)’ 때문에 현지 여론이 좋지 않다”고 했다. 더민주의 광주시당 관계자도 “여론조사를 돌려보면 국민의당 후보에게 확실하게 앞서는 곳이 하나도 없다. 안철수 쪽으로 바람이 불면 8개 선거구를 모두 내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총선이 끝나면 더민주가 다시 문재인 체제로 재편될 것이란 설도 파다하다”고도 했다.


이런 정세분석 속에서 나온 ‘강기정 아웃’ 카드는 김종인 지도부가 호남을 향해 준비한 상징적인 메시지일 수도 있다. 당 관계자는 “강 의원은 광주 지역에선 유일하게 문 전 대표 편에 섰다. ‘문재인 호위무사’로 낙인찍혀 지역구 여론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했다. ‘호남에서 배척하는 친노계’가 타깃이 됐다는 해석이다.


앞으로의 공천 심사 과정에서도 친노계의 탈락이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그래서 나온다. 지난 24일 발표된 현역 의원 10명의 공천 배제는 문재인 전 대표의 의지로 만들어진 혁신위원회가 정한 룰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김 대표와 홍창선 공천관리위원장은 3선 이상 50%, 초·재선 30%를 대상으로 별도의 정밀 심사를 벌여 공천 탈락자를 추가하기로 했다. 익명을 원한 중진의원은 “현역 10명에게 사용한 건 문재인의 칼이고 그 이후는 김종인의 칼”이라며 “의원 중 범친노그룹과 비노그룹이 6대 4인데 희생자 다수가 친노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재인의 총선용 소방수’ ‘더민주의 월급사장’ 역할에 머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김 대표가 친노계를 강하게 압박하는 걸 두고 당내엔 각종 소문이 떠다니고 있다.


“김현종은 반기문 영입 노린 포석” 그중엔 당내 반발을 뿌리치고 자신이 직접 발탁한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 역할론’도 있다. 더민주 관계자는 “김 전 본부장 영입은 그와 친분이 두터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끌어들이기 위한 포석이란 얘기까지 돌고 있다. 김 대표가 반 총장을 영입해 총선 후 복귀론이 거론될 문 전 대표를 견제하려 한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최근 불거진 김종인 비례대표 출마설도 비슷한 맥락이다. 총선 이후에도 그가 당에 남아 자신의 전공 분야인 경제민주화와 향후 대선 국면에서 역할 공간을 찾으려 할 것이라는 얘기다.


김 대표가 큰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친노계와의 긴장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당장 의원 컷오프를 두고도 친노계 의원들은 “정치적 전략도 없이 의원들을 쳐냈다”며 반발하고, 김 대표는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냐”며 맞서고 있다. 정치 싱크탱크 ‘더모아’의 윤태곤 정치분석실장은 이솝 우화의 한 토막을 소개했다. “개구리들이 제우스 신에게 ‘왕을 내려달라’고 하니까 막대기를 내려줬다. 개구리들이 ‘폼이 안 난다’며 ‘강한 왕을 달라’고 하니 이번엔 황새를 내려줬다. 개구리들이 좋아하다 황새에게 다 잡아먹혔다. 막대기 타령 하다가 김종인이란 황새가 내려온 격이다.”


“일단 호남당이라도 만들어놓아야” “솔직히 괜히 왔다 싶어. 그냥 책이나 보고 있을걸.”


25일 오후 국민의당 당사에서 만난 이상돈(전 중앙대 명예교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의 말이다. 2012년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에서 비대위원을 지냈던 그는 안철수 당 대표의 ‘십고초려’ 끝에 17일 입당했다. 당내에서 ‘합리적 보수 성향’을 대표하는 인사다. 입당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벌써 당내에서 ‘겉돌고’ 있다는 얘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정동영 전 의원이 워낙 큰 활약을 하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별로 있겠나”라고 그는 말했다.


이 위원장 입당 다음날인 18일 안 대표는 전북 순창에 내려가 정 전 의원 입당을 성공시켰다. 정 전 의원은 지난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 ‘선명 진보좌파 정치세력’인 ‘국민모임’의 결성을 주도했다. “중도를 표방한 국민의당에 정동영이 어울리느냐”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남 강화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당직자들은 말한다.


정 전 의원은 전주 덕진 출마를 선언했고, 22일 광주 5·18민주묘지에서 “국민의당이 전북·전남·광주를 석권해 야당다운 야당이 출현해야 정권교체의 전망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정 전 의원 합류를 신호탄으로 그에게 입당을 권유했던 권노갑 전 더민주 고문 등 더민주 탈당파 동교동계 인사들의 추가 합류도 이어질 전망이다. 한 당내 인사는 “거물급 인사를 영입해도 좀처럼 전국 지지율이 안 뜨고 있다. 우선 ‘호남당’이라도 만들어놔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라며 “광주·전남·전북을 아우르는 모양새 갖추기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상돈 위원장이 상징하는 당의 중도개혁 이미지는 당분간 왜소해질 가능성이 크다.


햇볕정책에 대한 태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5일 김종인 더민주 대표는 광주에서 “평화적 통일을 위해 대화를 통해 북한을 변화시키겠다는 게 햇볕정책인데, 북한이 핵을 보유한 지금은 계속 이를 추진할 수 없게 됐다.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진일보된 방식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국민의당에선 즉각 “햇볕정책을 손봐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광주시민들은 새누리당 지도부가 온 것으로 착각할 것”(김재두 대변인)이란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이날 오전 중앙SUNDAY가 국민의당 대북정책 책임자인 김근식 통일위원장과 나눈 대화는 이런 반응과 달랐다. 김근식 위원장은 “교류·접촉에 주안점을 둔 김대중 시대의 햇볕정책을 지금 그대로 적용하는 건 맞지 않다. 북한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제재하며 북한의 태도 변화에 초점을 둬야 한다”며 ‘햇볕정책의 진화’를 강조했다. 김종인 대표의 주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상돈 위원장도 입당 직후 “햇볕정책은 실패했고 대북정책을 원점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안철수 대표가 “핵 문제에서 성과를 얻지 못한 부분을 파악해 실패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라며 진화에 나서는 등 논란을 빚었다. 그 이후 당내에선 햇볕정책 수호론이 비등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햇볕정책을 동일시하는 호남 민심을 해치지 않기 위해선 햇볕정책이란 ‘성역’을 건드리기 어려워진 것이다.


앞으로 더민주와의 호남 쟁탈전이 더 치열해질수록 선명성 경쟁을 벌이느라 당초 내세웠던 국민의당 고유의 ‘중도’ ‘실용’ 색채는 더욱 희미해질지 모른다. 이렇게 당 운영이 호남 중심으로 흐르자 “수도권은 죽을 맛이다. 안 대표가 중심을 못 잡는다”(문병호 의원)는 불만도 노골적으로 터져나온다. 이상돈 위원장은 “바깥에선 (안철수 당이 아닌) ‘정동영·천정배 당’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고 꼬집었다.


이충형·추인영 기자 ad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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