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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TONG역기]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그리고 아이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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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뜻하는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포털의 실시간 검색 1위에 올랐습니다. 필리버스터의 일종인 무제한 토론 방식으로 현재 저지하고 있는 ‘테러방지법’과 이를 생중계하는 ‘국회 방송’, 토론에 나선 더불어민주당의 김광진, 은수미 의원까지 모두 TOP 10에 들었죠. 연예인을 제치고 정치나 법안에 네티즌들이 이런 관심을 보인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시사TONG역기에서 알아듣기 쉽게 풀어드립니다.

시사TONG역기-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그리고 아이폰

드라마 ‘어셈블리’에서 진상필 위원은 25시간에 달하는 필리버스터를 마치고 쓰러진다. [사진=드라마

드라마 ‘어셈블리’에서 진상필 위원은 25시간에 달하는 필리버스터를 마치고 쓰러진다. [사진=드라마 '어셈블리' 캡처, KBS]


지난해 KBS 드라마 ‘어셈블리’에서 진상필(정재영 분) 의원이 25시간의 필리버스터를 펼쳤던 장면 혹시 보셨나요. 지금 국회에서도 드라마 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법안 저지를 위해 흔히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나 장외투쟁을 하는 것만 보다가 '토론'이라는 걸 하니 신선하게 다가오는 게 사실입니다. 의회 안에서 야당이 준법 투쟁을 벌인다는 느낌도 나고요. 은 의원이 최장 시간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우며 결사반대하고 있는 테러방지법이 대체 뭐기에 이러는 건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 관심이 간만에 국회로 쏠렸죠.

먼저, 필리버스터가 뭔가요?


의회 소수파가 다수파의 독주 등을 막기 위해 고의적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합법적인 수단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것은 정말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이라고 했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관계 기사: 박 대통령, 야당 필리버스터에 "기가 막힌 현상">

미국·영국·프랑스 등 정치 선진국에서도 종종 일어나죠. 프랑스는 수정안을 무더기 제출해 방해하며, 일본은 연단에 천천히 들어서는 '소 걸음' 전술을 쓰기도 합니다.

필리버스터는 대항해시대 ‘약탈자’를 뜻하는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말로, 1854년 미 상원에서 법안 반대파 의원들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제한 토론 같은 장시간 연설 외에도 같은 발언의 반복, 의사진행 및 신상발언의 남발, 형식 절차의 철저한 이행, 각종 동의안과 수정안의 연속 제의 등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필리버스터의 폐단을 막기 위해 발언 시간을 제한하거나, 일정한 요건으로 토론을 종결할 수 있도록 보완책도 두고 있기도 합니다. 가령 영국은 1997년 블레어 정부 때 토론 시간에 상한선을 뒀지요.


필리버스터 세계 최장 기록은 24시간 8분

한국 필리버스터 최장 기록 10시간 15분을 은수미 의원이 10시간 18분으로 경신했다. [사진=중앙포토]


필리버스터 최장 기록은 1957년 미 의회에 상정된 민권법을 반대하기 위해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이 24시간 8분간 연설한 것입니다. 국내에선 1969년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3선 개헌을 저지하려고 10시간 15분간 발언했던 것이 가장 길었는데, 24일 은수미 의원이 3분을 더 추가해 최장기록이 됐죠. 1964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의원 시절 동료의 구속동의안을 막기 위해 5시간 19분간 연설한 것도 유명합니다.

필리버스터는 이후 1973년 박정희 대통령 유신 집권 때 금지했다가 2012년 '국회선진화법'을 통해 부활했습니다.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을 겨냥한 국회폭력방지특별법을 관철하기 위해 도입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자기 발목을 잡았다는 말이 나오는 건 그래서죠.


무제한 토론은 국회법 제106조 2항에 따라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로 개시할 수 있으며 한 사람이 한 차례 의사 정족수의 제한 없이(듣는 이가 아무도 없어도) 토론할 수 있습니다.


제도 부활 이후 처음 적용한 이번 필리버스터로 정부 여당이 추진하고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테러방지법은 2월 임시국회 내 통과가 불투명해졌습니다. 더민주를 비롯한 국민의당, 정의당까지 가세해 몇 시간씩 계속 연설하면 이번 회기 내 안건 처리가 모두 지연되기 때문이지요.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키려면 재적 5분의 3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데 새누리당 의석(157)을 다 모아도 전체 293석의 53%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회기가 끝나는 3월 11일 이후면 필리버스터는 자동 종료되고 다음 회기에서 표결에 부칠 수 있습니다. 또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 획정안 역시 본회의 통과를 기다리고 있어 야당의 부담도 만만찮습니다. 때문에 테러방지법 수정에 대한 여야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요.

국회의장은 왜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 했나

정의화 의장은 지난 4일 통과한 이른바 원샷법(기업활력제고를 위한 특별법)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직권상정을 요구하는 청와대와 여당의 요구를 국가 비상사태가 아니라며 거부해 왔습니다. 그 결과 여야 합의로 처리하는 수순을 밟아왔기 때문에 이번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을 놓고 외부의 압박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케 했습니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 발효 이후 직권상정도 처음이거든요.

다수당인 여당이 다수결로 처리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일까 싶지만 독재를 청산하고 민주화를 추구해 온 현재 국회는 다수당의 일당 독재를 막기 위해 여야 합의를 우선하고 있습니다. 합의가 안 될 때의 국회의장 직권상정도 요건을 까다롭게 규정하고 있고요.

국회법 85조에 따르면 '천재지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국회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와 합의하는 경우 의장이 안건에 대한 심사기일 지정을 할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북핵 개발과 북한의 잇따른 위협 발언으로 지난해 IS 테러 이후 고조됐던 테러방지법에 대한 보수 진영의 여론이 집결하는 듯 보이자 정 의장은 결국 지난 23일 직권상정 카드를 꺼내 들었고, 더민주 의원 108명은 즉각 필리버스터로 맞선 것이죠.

테러방지법은 정부가 16년째 추진해 왔지만 야당과 진보 시민사회 진영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습니다. 그러나 야당 측은 테러 위험에 대한 여론도 무시할 수 없어 독소 조항을 수정한다면 통과시킬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도대체 테러방지법이 뭐기에

해외에서 IS 등에 의한 대규모 테러가 잇따르며 국내 역시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롯데월드몰을 비롯 여러곳에서 지난해 말 테러 대응 전담반을 신설했다. [사진=중앙포토]

해외에서 IS 등에 의한 대규모 테러가 잇따르며 국내 역시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롯데월드몰을 비롯한 여러곳에서 테러 대응 전담반을 신설하고 테러 대응 훈련을 한 바 있다. [사진=중앙포토]


테러방지법의 골자는 군·경찰·국가정보원으로 분산된 대테러 업무를 ‘대테러센터’로 집중시켜 테러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자는 것입니다. 국가정보원장 산하에 ‘대테러센터’를 두고 국방부·행정안전부·법무부 등 관계기관의 대테러 업무를 기획·조정하고 특히 테러단체 구성원으로 의심되는 외국인의 통신 정보를 수집, 자금 등 동향을 파악해 출입국에게 금융거래를 중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입니다. 국가중요시설을 테러에서 보호하고자 대통령에게 군병력 지원도 건의할 수 있게 되죠.

지난 2001년 미국의 9·11 테러 이후 추진된 법으로, 2003년 수정안이 국회 정보위원회를 통과했습니다. 원안에서 모호했던 ‘테러’의 개념을 ‘국제적으로 공인된 테러 관련 국제협약에서 범죄로 규정한 행위’로 명확히 하고 테러 단체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지목하는 단체 또는 이와 연계된 단체’로 한정했습니다.

하지만 야당은 국정원이 대테러 명분으로 민간인의 뒤를 캐는 사찰이나 야당 감시에 악용할 것을 우려하며 '테러방지법이 국가보안법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반대해 16대 국회에서는 폐기됐습니다. 더민주 원내대표 이종걸 의원은 “테러 방지라는 불명확한 사유로 긴급 감청을 통해 이메일, 문자, 카톡에 접근해 인권을 유린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고요. 그간 국정원이 간첩 조작이나 선거 개입 등의 사건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국정원에 이 같은 권한을 주는 것이 타당하냐는 지적도 많은 게 현실입니다.

국가안보와 프라이버시 충돌

"아이폰 잠금 풀어라" vs "뒷 문을 열어줄 수 없다"

미 FBI의 잠금장치 해제 요구에 애플이 고객의 정보 보호를 이유로 거부했다. 이후 애플의 홈페이지에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해 애플이 고객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사진=에플 홈페이지 캡처]

미 FBI의 잠금장치 해제 요구에 애플이 고객의 정보 보호를 이유로 거부했다. 이후 애플의 홈페이지에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해 애플이 고객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사진=애플 홈페이지 캡처]


해외에서도 테러 대처를 놓고 국가안보와 국민 개인의 자유라는 두 가치가 전면 충돌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IS의 파리 테러를 당한 프랑스는 경찰이 영장 없이 위험인물의 집을 수색할 수 있도록 한 국가비상사태를 오는 5월까지 연장한 상태입니다. 이어 테러 유죄를 받으면 프랑스 국적을 박탈하는 개헌안을 추진 중이어서 인권 단체인 국제앰네스티 등의 비판을 받고 있죠.

미국에서는 테러범의 아이폰 잠금을 해제해 달라는 연방수사국(FBI)의 요구를 애플이 거부해 논란입니다. FBI는 지난해 12월 샌버나디노 총기 테러로 사살된 사예드 파룩의 아이폰 잠금을 풀어 달라며 연방 판사의 명령까지 받아 제시했으나 애플 등 IT 업계는 이것이 선례가 되면 세계 각국의 사법 당국이 IT 보안 기능을 무력화할 것이며, 사용자들의 사생활과 통신 자유를 침해할 것이라며 맞서고 있죠.

반테러법을 강화한 애국자법(Patriot Act)도 같은 논란을 겪었습니다. 9·11 테러 이후 제정한 한시적 애국자법은 외국인과 자국민을 도감청하고 통신기록의 수집을 허용해 인권침해 소지가 있었습니다. FBI가 행정명령인 국가안보레터를 발송하면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 은행, 신용카드사 등 민간기업이 가입자의 통신 또는 거래 기록을 제공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FBI 등 수사기관의 테러 혐의를 받는 외국인의 기소 전 구금 기간을 48시간에서 최고 7일까지 늘리기도 했고요. 애국자법은 오바마 대통령이 2011년 4년 더 연장했지만, 2013년 국가안보국(NSA) 직원 스노든의 무차별 도감청 실태 폭로로 여론이 악화돼 결국 지난해 6월 폐기했습니다. 지금은 민간기업에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조항은 미국자유법(Freedom Act)에 남아 있습니다.

글=박정경 기자 park.jeongk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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