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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의 아이슬란드 오디세이] ④ 매직 아일랜드, 스나이펠스네스 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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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미쳐도 좋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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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나이펠스네스 반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택한 곳은 그륀다르피요르두르(Grundarfjörður)라는 마을이었다. 본래 가려던 곳은 아니었지만, 일정을 바꾸며 새로 추가한 곳이었다. 반도의 중심 마을인 스티키숄무르(Stykkishólmur)에서 그륀다르피요르두르 까지의 여정은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과 같았다. 진한 녹색 이끼로 가득 덮인 현무암 무더기가 들판을 이뤘는데, 미친 풍경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이곳의 이름은 베르세르캬흐뢴(Berserkjahraun)이다. 베르세르크의 용암 들판(Berserk’s lava field)이라는 뜻이었다. 영웅전설 속 전사의 이름 베르세르케르(혹은 버서커, Berserker)에서 유래했는데, 직역하면 ‘미치광이의 용암 들판’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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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계획 없이 아이슬란드로 왔지만, 반드시 하고 싶은 몇 가지는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끼로 가득 덮인 푹신한 라바필드 위를 걸어보는 일이었다. 라바필드로 달려들었다. 발을 내딛자마자 초록색 이끼가 신발 모양 그대로 푹 하고 꺼졌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마치 마시멜로 위를 걷는 듯한 기분에 마음이 울렁였다. 나는 롤러코스터를 타도 소리 한 번 질러본 적이 없었고 산에 올라도 함성 한 번 외쳐본 적 없었다. 감정을 느끼는 것에는 담대했지만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쑥스러웠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이 괴상한 초록 벌판에서만큼은 무엇이라도 외쳐야만 했다. 후련하게 소리를 지르고 나니 고삐가 풀렸다.

이끼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 보고, 만져보기도 하고, 입에 갖다 대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누워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밤새 물기를 가득 먹은 이끼 탓에 옷이 금세 축축해졌다. 아무래도 좋았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미친 사람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미치광이의 라바필드에서는 미쳐도 좋았다.

4.2 키르큐펠의 마법

아이슬란드 마을 대부분이 그렇지만, 그륀다르피요르두르는 유독 아기자기하고 동화 같다. 그륀다르피요르두르는 굵직한 산맥의 품 안에 안겨있었다. 마을에는 색종이로 접은 것 같은 알록달록한 집들이 가득했다. 문을 열면 키가 무릎만 한 난쟁이 마법사들이 나올 법한 느낌이었는데, 아마도 마을 뒤쪽에 있는 독특한 모양의 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을을 지나 조금 깊숙이 들어가면 원뿔꼴의 민둥산, 키르큐펠(Kirkjufell)이 나온다. 교회 산이라는 뜻이다. 지붕이 뾰족한 아이슬란드 교회의 모습과 비슷하여 붙은 이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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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의 산과 들판은 푸름을 벗어 던졌다. 누렇게 바랜 채로, 조금은 초라하고 황량한 모습으로, 하얀 눈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문득 키르큐펠이 늙은 마법사의 누더기 모자 같다고 생각했다. 맞은편 산마루에서는 물줄기가 내려와 이층 폭포를 만들었고, 부서진 물은 강으로 흘러들어 동화 같은 마을 사이를 굽이굽이 돌았다. 폭포 위쪽에는 다리가 있어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주변 풍경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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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초라하게 본 여행자를 비웃기라도 하듯, 산과 들판은 점점 오묘한 색깔을 뽐냈고, 폭포 소리는 더 강해졌다. 시원하게 낙하하는 폭포 뒤의 키르큐펠은 위풍당당했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놀랍도록 달라지는 풍경이 신기해서 주변을 하염없이 휘젓고 다녔다. 한참을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두어 시간이 지나있었다. 폭포에서 내려오는 내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차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키르큐펠과 마을이 꿈처럼 사라져갔다. 나는 늙은 마법사의 누더기 모자를 닮은 저 산이 마법을 건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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