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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시를 길어 올리는 영혼의 가압장 공간을 존중한 결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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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이 ‘동주’(2월 17일 개봉)를 찍기 전 모든 스태프에게 반드시 가 보라고 당부한 곳이 있다. 바로 서울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윤동주 문학관이다. 윤동주(1917~48)가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1941년, 소설가 김송(1909~88)의 집에 하숙하며 매일같이 시상을 다듬던 산책길이 이 어귀다. 아름드리 고목에 안겨 있는 듯한 건물은 그의 시처럼 단아하지만, 들어서는 순간 뜻밖의 반전이 펼쳐진다. 시인의 생애와 시를 소개한 아담한 전시실을 지나 묵직한 철문을 밀고 나서면 물때 낀 오래된 물탱크의 뚫린 천장 위로 새파란 하늘이 담겨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와 밤마다 빛나는 별까지.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시)』. 요절한 시인이 생전에 펴내지 못한 시집 제목을 그대로 닮은 공간이다. 과거에 낡은 수도 가압장이었던 이곳을 윤동주 문학관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주인공은 이소진(49·아뜰리에 리옹 서울) 대표. 한강 나들목 재단장 프로젝트, 삼청공원 숲속 도서관 등 의미 있는 공공 건축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해 온 건축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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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여다연(STUDIO 706)

‘영혼의 가압장’. 윤동주 문학관에 이런 애칭이 붙은 데는 사연이 있다. 가압장이란 높은 지대에 물이 공급되도록 느린 물살에 압력을 가하는 시설이다. 1974년 산기슭에 아파트가 들어서며 생긴 청운 수도 가압장은 아파트가 헐리면서 용도를 잃고 2009년 35년 만에 폐쇄됐다. 그로부터 3년 후 7월, 윤동주 문학관이 문을 열고부터 이곳은 새로운 의미의 가압장이 됐다. 메마른 영혼에 물 대신 시(詩)를 길어 올리는 영혼의 가압장 말이다. 문학관 덕택에 제 영혼을 지켜낸 건 건물도 마찬가지다. 낡고 보잘것없는 건물이 지나온 역사까지 간직할 수 있던 건 마침 종로구가 찾던 문학관 부지와 맞춤한 위치덕분이었고 또 하나, 이소진 대표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윤동주 문학관 설계한 건축가 이소진

건물 하나를 지어도 주변을 살펴야 한다

이 대표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졸업 후 1991년 파리로 갔다. 5년여의 공부를 마치고 파리에서 건축가로 일한 10년의 태반을 공공·재생 건축에 힘 쏟았다. 낡은 건축을 공공의 목적으로 고스란히 되살려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공모전을 수없이 준비하고, 당선된다 한들 수익보단 보람이 더 큰 일이지만 그는 그저 “좋았다”고 말한다. 그 명쾌한 표현에서 감지되는 건 그저 사회적인 책임감만이 아니다. 프랑스 과학자 퀴리 부인(1867~1934)이 방사성 물질 라듐을 발견한 파리 5구의 허름한 건물에 지구과학 연구소를 옮겨지으며 장판에 아직도 흩어진 라듐 가루 때문에 공사가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1991년부터 시작된 파리 13구의 ‘리브고슈’ 재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천천히 변화하는 도시가 얼마나 뿌듯했는지를 말할 때 그의 목소리에선 외려 설렘이나 즐거움의 감정이 감지된다.

2006년 고국에 돌아와 제일 먼저 뛰어든 한강 나들목 디자인은 또 어떻고. 건축가로서는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으니 낯설다면 낯선 국내 첫 프로젝트다. 도로나 주거지를 한강 둔치와 잇는 나들목은 생김새나 쓰임새도 제각각이어서 작업은 더욱 까다로웠다. 어려울수록 기운이 솟는 걸까. 수문 개·폐형부터 한강물이 불면 임시 물탱크 역할까지 나들목을 특색에 맞춰 변화시키던 당시를 회상하며 이 대표는 여러 번 “참 재밌는 게…”라고 운을 뗐다. 그건 그가 즐거웠던 작업을 얘기할 때 자주 쓰는 말버릇이다.

“참 재밌는 게 건축은 답이 상황마다 다 달라요. 도시를 알아야 건축할 수 있고, 건축을 알아야 도시를 지을 수 있다는 건 파리에서 스승이자 상사였던 이브 리옹(아뜰리에 리옹) 대표에게 배웠어요. 건물 하나를 지어도 주변을 살펴야 한다는 거죠. 주위 환경을 자연스럽게 활용하며 설계하다 보면 공간에 의외의 재미가 생기기도 해요.”

창밖으로 숲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삼청공원 숲속 도서관도 울창하게 들어선 고목들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건물을 “끼워 넣은” 그의 발상에서 출발했다. 곁에 두고도 몰랐던 공간의 가치를 제대로 느끼게 하는 것이 본분이라 믿는 이 대표. 그에게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은 2011년 여름에 찾아왔다. 윤동주 문학관 공사가 한창이던 그날을 지금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우연히 발견한 물탱크, 우물로 재탄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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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관|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9 www.jfac.or.kr|02-2148-4175

“너무 놀랐죠. 보물을 찾은 것 같았어요.” 건축가의 솔직한 심정이다. 처음에 그가 종로구에 의뢰받은 건 수도 가압장의 좁은 기계실 건물을 윤동주 문학관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었다. 영상 하나 틀 여유도 없이 비좁은 건물. 설계는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 기계실 옆 정체불명의 시멘트 옹벽이 문제가 됐다. 집중 호우로 인한 우면산 산사태가 민가와 도로를 덮쳤던 해다. 불안한 마음에 이 대표는 종로구와 함께 옹벽의 정체를 진단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기계실 옥상정원에 가려져 있던 두 개의 철문이 발견됐다. 열어 보니 바닥이 보이지 않는 텅 빈 공간. 언뜻 물소리가 났다. 옹벽의 정체는 바로 콘크리트 물탱크의 외벽이었다. 쌍둥이처럼 똑같은 물탱크 한 쌍이 언덕 아래에 나란히 파묻혀 있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 물탱크를 어떻게든 시인과 연결시켜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시관으로 재정비하기에 깊이 5m의 물탱크는 너무 어둡고 습했다. 물탱크를 제일 먼저 ‘우물’이라 부른 건 문학관의 스토리텔링을 도맡은 브랜드스토리 정영선 이사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 속 우물에서 빌려온 이름은 절묘했다. 이소진 대표는 더더욱 “공간이 가진 가치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단열·냉난방 설비를 해 버리면 벽체의 옛 흔적이 다 사라질 터였다. 우물 밑바닥 같은 고요한 정취를 항온·항습기의 소음과 맞바꾸고 싶지 않았다. “실내 전시실로 만드는 걸 과감하게 포기하니 설계가 술술 풀리기 시작했죠.”

천장을 없애고 중정을 마련한 물탱크는 ‘열린 우물’, 천장을 그대로 둔 물탱크는 ‘닫힌 우물’이라 이름 붙였다. 기계실을 리모델링한 실내 전시실 ‘시인채’에는 윤동주가 초등학교 시절에 쓴 시 ‘오줌싸개 지도’부터 대학 시절 좋아하던 백석 시집 필사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대표작 육필 원고·사진·영인본 등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시인의 조카이자 유족 대표 성균관대 윤인석 교수가 문학관을 위해 윤동주의 유품 133점을 기증했다.

“문학 소녀는 아니었다”는 이 대표가 “가슴에 스며서 전시를 권한” 시도 있다. 성경의 마태복음에서 여덟 가지 복을 담은 구절 중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만 여덟 번 반복하는 시다. 윤동주 작품 중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윤 교수의 집에서 영인본을 뜰 육필 원고를 고를 때에 “눈에 딱 띄었다”며 “암흑의 시대를 살아간 시인의 슬픔이 솔직하게 와 닿았다”고 그는 털어놨다.

하늘이 보이는 열린 우물, 극장이 된 닫힌 우물

윤동주의 정결하고 순수한 시처럼 문학관은 꾸밈없이 단순해야 했다. 무엇보다 인왕산에 자리잡은 건물다워야 했다. 물탱크 벽을 더 높여 우물 바닥에 있는 듯한 효과를 극대화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 대표가 반대한 까닭이다.

“물탱크 벽을 높이면 산등성이보다 솟아오를 텐데, 윤동주 문학관이 산세를 거스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가압장이 건축적으로는 별 거 없는 건물이지만 한자리에 40년간 있었잖아요. 이 동네를 오가는 사람들한테는 늘 무의식중에 자리를 지키던 건물이죠. 그 풍경을 유지하는 게 저한테는 중요했어요. 좀 깨끗해졌다는 느낌 정도? 공사를 시작할 때 또 어떤 흉물이 동네를 망치려나, 했던 주민들이 많이 변하지 않아서 좋다고 하더라고요. 고맙단 말을 들었을 땐 오히려 제가 더 고마웠죠.”

시인채에서 “발견의 감각을 주기 위해” 부러 무겁게 만들었다는 철문을 어깨 근육이 바짝 깰 만큼 힘주어 밀면, 열린 우물의 벽면을 따라 기역 자로 굽은 경사로가 완만하게 뻗어 있다. 경사가 가파르면 핸드레일을 세워야 하는데 그마저도 공간의 호젓함을 방해할까봐 열린 우물 바닥에 흙을 채워 높이를 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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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새파란 하늘에 가지를 드리운 건 팥배나무다. 여름이면 잎이 무성하고 가을엔 빨간 열매가 맺혀 열린 우물에서 계절과 바람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존재다. “처음 봤을 때 기계실 외벽과 나무 거리가 2㎝ 정도여서 공사하며 뿌리가 반 넘게 드러났어요. 살리려고 최대한 애를 썼죠. 그런데 물탱크 천장을 철거하고 나니, 열린 하늘로 나뭇가지가 싹 드리워지더라고요. 생각도 못했어요. 나무를 살려서 받은 선물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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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리고 철문을 닫으면 철컥, 완전한 어둠에 잠기는 닫힌 우물.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기까지 윤동주의 시와 생애를 담은 짧은 영상이 상영되는 이곳은 일종의 작은 극장이다. 물탱크의 옛 개구부였던 천장의 작은 구멍으로 들이치는 빛은 녹이 슬어 떼어낸 사다리 자국만 점점이 비출 뿐. 울컥한 눈물을 슬쩍 닦아내도 민망하지 않을 만큼 짙은 어둠이 내내 먹먹하게 깔려 있다.

사람들의 상상이 채운 공간

강박적으로 꽉 짜인 공간에 숙한 국내 건축에서 여백이 많은 윤동주 문학관은 이례적인 공간이다. “열린 우물에 조각이라도 세우자는 의견을 애써 설득하며” 큰 변형 없이 개관 4년차를 맞은 지금, 지킴이를 자처하는 건 문학관을 다녀간 이들이다. “한 번은 무슨 전시회를 한다고 열린 우물에 이젤 같은 걸 잔뜩 세워놨더니 민원이 들어왔대요. 그 공간 좀 내버려 두라고요. 영화 ‘동주’를 보고 마음이 짠했거든요. 흑백영화인 걸 두고 주연 배우 강하늘이 ‘색이 사라져서 오히려 더 화려하게 상상하게 됐다’고 하던데, 정말 공감해요. 윤동주 문학관도 비워 놓은 공간을 사람들의 상상이 채워줬어요. 건축 의도보다 더 멋지고 다양한 해석을 보면 비워 놓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윤동주 문학관으로 2013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국무총리상, 201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 등을 수상한 이 대표. 인터뷰 도중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나는 외부도 내부도 아닌 공간을 좋아하는 것 같다”며 웃는다. 그가 최근에 착수한 건 과천 서울대공원 해양관 프로젝트. “지난해 파리의 오래된 동물원이 생태계 친화적인 공원으로 조성된 것처럼, 동물원의 개념을 달리하는 공간으로 조성하고 싶어요. 돌고래 쇼처럼 인위적으로 꾸민 모습이 아니라 해양 동물의 자연스러운 습성이 보는 이에겐 하나의 퍼포먼스가 될 수 있도록요. 전문가들과 의논 중인데, 꽤 오래 공들여야 할 것 같아요.” 머무는 이에게 가장 좋은 공간을 꿈꾸는 그의 마음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그 주체가 해양 동물이란 건 그에게는 꽤 흥미로운 도전이다. 작은 문학관에서마저 미지의 영역을 들춰낸 모험가가 아닌가. 그의 새로운 탐구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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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가 이소진이 설계한 공간

한강 나들목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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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뜰리에 리옹 서울

2006년 한국에 온 스승 리옹은 “한강에 할 일이 많아 보인다”고 했다. 그 말이 계시였을까. 다른 젊은 건축가들과 함께한 한강 나들목 재단장은 이 대표가 한국에서 작업한 첫 공공건축 프로젝트가 됐다. 불편하고 후미진 나들목에 디자인을 가미한 이 작업은 한강을 이용하는 많은 시민들의 일상의 질을 끌어올렸다. 재단장된 30여 곳 중 금호·암사·서초·마포종점 나들목은 이 대표의 솜씨다.

삼청공원 숲속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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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인석

2013년 문을 연 이래로 삼청공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다. 북카페와 놀이방을 의뢰받은 건축가가 계곡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경사진 부지를 활용해 2층짜리 건물로 확장했다. 단층 북카페인 줄 알고 들어섰다가 아래층 도서 열람실을 보고 놀라는 이가 많다. ‘숨은 보물 찾기’처럼 사람들이 쉽게 예상하지 못한 공간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윤동주 문학관과 닮았다.

시리아의 에어컨 없는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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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뜰리에 리옹

2000년 초 공모전을 통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설계한 이 학교는 에어컨 없이 친환경 냉방을 시도했다. 먼저 건물 사이사이의 작은 정원을 차양 시스템으로 그늘지게 유지해 차가운 공기를 모은다. 그리고 건물 내·외부 온도차에 의해 공기가 유동하는 굴뚝 효과로 찬 공기를 순환시키는 것. 이 대표 특유의 경계 없는 공간에 대한 탐구가 적극 드러난 건축이다.

글=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여다연(STUDIO 706), 아뜰리에 리옹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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