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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이 넓은 세상 위에 수많은 사람 중에 오직, ‘캐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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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캐롤' 스틸컷.

사랑해요(I Love You).”

여느 멜로영화에선 너무도 흔한 이 말이 ‘캐롤’(2월 4일 개봉, 토드 헤인즈 감독)에는 딱 한 번 나온다.

부자 남편을 둔 중년 부인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20대 백화점 점원인 테레즈(루니 마라). 신분과 나이 차이 그리고 성(性)에 대한 완고한 고정관념, 1950년대 뉴욕 사회에서 이들이 넘어야 할 벽은 한둘이 아니었다. 동성애가 법으로 처벌받던 시대다.

금지된 연인에게 달콤한 고백 따윈 위험한 사치였다. 그 후에 닥쳐올 쓰라린 아픔을 기꺼이 감내한다 해도 말이다. 그러나 원한다고 멈춰지지 않는 게 사랑이다.

붐비는 인파 속에서도 오직 서로만 보이는 지독한 사랑. 처음 본 순간,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 주고받은 눈빛이 영화 ‘캐롤’의 출발점이나 다름없다. 영화화에 착수해 스크린에 옮기기까지 자그마치 11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 ‘캐롤’. 토드 헤인즈 감독은 어쩌면 실화였을지도 모를 여류 작가의 원작 소설을 토대로 아주 특별한 러브스토리를 세공했다.

2016 아카데미 시상식, 이 부문을 노린다
여우주연상 케이트 블란쳇 ★★★ | 여우조연상 루니 마라 ★★★★★
1월 14일(현지 시각) 공개된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서 ‘캐롤’은 각색상·촬영상·의상상·음악상 등 여섯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가장 유력한 건 단연 여우주·조연상. 아카데미 시상식에 일곱 번째 후보에 오른 케이트 블란쳇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브리 라슨(룸)이라는 만만찮은 경쟁자를 만났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가 극찬한 루니 마라의 여우조연상의 수상 확률은 더욱 높다.

쉰다섯 살의 남자 감독이 ‘캐롤’ 속 여성들의 미묘한 감정선을 이해할 수 있던 건 그가 바로 토드 헤인즈이기 때문이다.

‘벨벳 골드마인’(1998) ‘파 프롬 헤븐’(2002) ‘아임 낫 데어’(2007) 등 전작에서 헤인즈 감독은 시대의 틀을 벗어난 이들이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순간을 미려하게 포착해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아름다운 복고풍 의상과 미술, 절제된 영상미 속엔 늘 은근한 성(性)적 긴장감이 감돌았다. 인생을 뒤흔들 만큼 치명적이고 비밀스러운 사랑의 조짐 말이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 소설 『소금의 값』을 읽어본 적도 없는 그가 ‘캐롤’의 시나리오에 끌릴 수밖에 없던 이유다.

캐롤’을 연출하기로 결정한 뒤, 레즈비언 친구들이 필독서라며 그 소설을 알려줬다. 동성애를 다루면서도 엔딩이 파격적이었다. 사실 1950년대엔 여성들의 동성애가 드물었다. 주인공 캐롤과 테레즈는 사회적으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들과도 조금 달랐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고 고군분투하면서,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한다. 자신들의 사랑을 창조해가며 그들만의 언어를 찾아내고, 궁극적으로 삶을 변화시킨다. 그들의 사랑은 급진적이고 독창적이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 테레즈
헤인즈 감독의 말처럼 만약 캐롤이 가정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혹은 테레즈가 남자친구와의 결혼이나 사진작가(원작 소설에는 극장 세트 디자이너)로서 출세하는 데 지장이 있다며 서로에 대한 감정을 끝내 억눌렀다면 둘의 관계는 발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네 살배기 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간 캐롤은 장난감 코너에서 마치 진열된 인형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의 귀여운 점원 테레즈를 발견한다. 먼 거리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저 사람을 곧 사랑하게 되리라는 어렴풋한 확신과 함께.

캐롤이 두고 간 장갑을 테레즈가 챙겨주면서 둘은 다시 만난다.

우리 집에 놀러 올래요?”

지나가듯 조심스레 던진 말에 테레즈가 곧장 “좋다”고 하자 캐롤은 기뻐하며 나지막이 말한다.

당신 참 신기한 사람이에요.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 같아요.”

동성애 경험이 있는 캐롤과 달리, 테레즈가 처음에 느낀 건 동경에 가까운 감정이었을 터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테레즈는, 이성적이고 원하는 삶을 정확히 알고 있는 캐롤을 우상처럼 우러러본다. 캐롤의 이혼 소송이 시작되고 테레즈와 그가 둘만의 여행을 떠나면서 그런 구분은 곧 의미가 없어지지만.

타오른 사랑은 캐롤의 이혼 소송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남편은 ‘윤리적인 문제’로 양육권을 빼앗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딸을 다시 만나기 위해 캐롤은 정신과 상담을 강요받는다. 축축하게 안개 낀 겨울의 맨해튼 거리에서 쇼윈도 뒤에 홀로 선 캐롤의 모습은 고독하고 불안하다.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인파 속에 모습을 감추는 그는 테레즈를 향한 진심 또한 억눌러야만 한다. 딸의 숨소리 대신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빗 하나를 덩그러니 가슴에 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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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 헤인즈 감독(왼쪽)과 케이트 블란쳇

하이스미스는 왜 가명으로 원작 『소금의 값』을 썼을까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이런 질문이 가능한 건 『소금의 값』이 하이스미스의 자전적 로맨스라는 단서가 적지 않아서다. 하이스미스는 “1948년 크리스마스 직전, 잠시 백화점 장난감 코너 점원으로 일할 때 모피 코트 차림의 멋진 금발 귀부인에게 영감을 얻었다.

그날 밤, 두 시간 만에 초고를 완성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와 여섯 살 연상의 여인 버지니아 켄트 캐터우드의 실제 러브스토리는 소설과 거의 흡사하다. 필라델피아 사회의 명사였던 캐터우드는 도청으로 자신의 동성애 사실이 들통나 자녀에 대한 양육권을 박탈당했다.

첫 소설이 1951년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면서 범죄 소설가로 명성을 얻은 하이스미스는, 이듬해 클레어 모건이라는 가명으로 『소금의 값』을 발표한다. 그가 살인 사건을 다루지 않은 유일한 작품이었다.

1990년 영국에서 본명으로 『소금의 값』을 재출간할 때까지 하이스미스는 단 한 번도 이 소설을 자신이 썼다는 걸 공식 석상에서 밝히지 않았다.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은 범죄·심리 스릴러로 채워졌다.

“어릴 적부터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살인을 즐기는 사이코패스가 이웃집에 산다고 상상”하는 꽤 섬뜩한 방법으로 자신만의 문체를 개발했다는 하이스미스. 테레즈를 화자로 내세운 『소금의 값』을 제외하면 그의 소설은 극단적이고 삭막한 산문체가 주를 이룬다. 실화 여부를 떼어놓고 봐도 이 소설은 그에게 분명 이례적인 작품이다.

훗날 영화화된 다른 스물세 편의 작품과 함께 이 소설이 하이스미스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까닭이다. 국내 번역본은 1월 말 출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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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자욱한 뉴욕 거리를 유화 그리듯
헤인즈 감독은 캐롤 역에 제일 먼저 케이트 블란쳇(45)을 떠올렸다. 블란쳇은 전설적인 뮤지션 밥 딜런을 전혀 다른 여섯 명의 페르소나로 재해석한 ‘아임 낫 데어’에서 악역을 맡았던 적이 있다. 헤인즈 감독은 “자유자재로 펼치는 블란쳇의 연기”에 흠뻑 빠졌다.

샐리 포터, 질리언 암스트롱 등 페미니스트 영화감독과 수차례 작업하고, 여성의 성정체성을 다룬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자선 무대에 오를 만큼 의식 있고 진중한 이 배우는 ‘캐롤’을 함께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영화적 동지이기도 했다.

‘밀레니엄’ 시리즈(2012~) ‘소셜 네트워크’(2010, 데이비드 핀처 감독) 등으로 급부상한 루니 마라(30)는 첫 만남부터 헤인즈 감독의 신뢰를 얻었다.

영화에서 어떤 인물이 단 두 시간 만에 뚜렷한 성장 과정을 보여줄 때가 있다. 초반의 순진한 테레즈와 아픈 사랑을 겪은 후의 테레즈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마라는 그걸 잘 이해하고 훌륭하게 소화했다.”

 ‘캐롤’에서의 열연으로 마라는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파 프롬 헤븐’ ‘아임 낫 데어’ ‘밀드레드 피어스’(2010)에 이어 헤인즈 감독과 네 번째로 함께한 촬영감독 에드 러취맨은 수퍼 16㎜ 카메라를 이용해 1950년대 35㎜ 필름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헤인즈 감독은 당시의 광고와 사진에서도 상당한 영감을 얻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밝은 색감이 뉴욕을 장악하기 전이었다. 안개나 수증기가 자욱한 거리와 때 묻은 듯 얼룩덜룩한 색감은, 음울하지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감독에 대한 무한 신뢰 속에 편안하게 촬영된 캐롤과 테레즈의 러브신까지, 헤인즈 감독은 유화를 그리듯 섬세하고 신중하게 명장면을 직조해 나갔다.

[클릭! 인터뷰] 케이트 블란쳇 & 루니 마라

영화 비평 사이트 메타 크리틱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기록하며 이미 열띤 호평을 받고 있는 ‘캐롤’. 2014년 ‘블루 재스민’(우디 앨런 감독)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여성영화가 비주류라는 바보 같은 편견을 깨라”고 일갈했던 블란쳇은 이 영화로 또다시 오스카 트로피를 차지할 수 있을까.  개봉관에서 직접 확인하시라.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더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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