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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경의 Shall We Drink] ③ 해변의 노을 그리고 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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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동안에 하루에 한 가지씩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해변의 노을과 눈 맞춤.

지난 봄 포르투갈의 여러 소도시를 거쳐 마침내 어촌 마을 나자레(Nazaré)에 도착했을 때다. 여행 트렁크와 카메라 가방을 부려 놓고 호텔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인적이 드문 해변에 일곱 겹 치마(나자레의 전통의상)를 입은 할머니들이 드문드문 지났다. 때마침 일몰이 흐린 하늘을 연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밖으로 내달렸다. 곧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해의 뒷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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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태양이 하얀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파도 위에 아른거렸다. 노을의 마중으로 여행을 시작하다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아 이렇게 혼을 쏙 빼놓을 만큼 근사한 풍경은 좋은 와인을 한잔과 함께 마음에 담아둬야 하는데’라고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적당한 곳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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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자레의 명물은 파도다. 깊이 5000m의 해저 협곡이 거대한 파도를 일으킨다. 2011년 11월 하와이안 서퍼 가렛 맥나마라(Garett Mcnamara)가 31m 높이의 파도를 타며 나자레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휴가철을 제외하고, 그처럼 큰 파도를 타겠다는 야심을 품은 서퍼가 아니라면 이곳에서 딱히 할 일은 없다. 절벽 위의 성당 2곳을 둘러보면 명소는 섭렵한 셈이다. 메모리아 소성당(Ermida da Memória)은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곳이고, 노사 세뇨라 성당( Igreja de Nossa Senhora)은 이스라엘 나자레에서 온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 곳이다. 둘 다 작지만 이름난 성지 순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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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느린 시간을 보내기에 나자레만 한 곳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무작정 해변을 따라 걷어도 좋고, 모래 위에 앉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봐도 좋다. 해변과 절벽 위의 시티우 마을을 잇는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 수베르쿠 전망대(Miradouro do Suberco)에 서면, 초승달 모양 해변이 장대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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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마을 아랫마을 할 것 없이 골목 안에는 노랑색과 파랑색으로 두른 색색의 집이 빼곡하다. 골목마다 정어리 굽는 냄새 솔솔 풍길 때면, 마음에 드는 식당에 앉아 정어리와 화이트 와인의 궁합에 대해 찬찬히 탐구할 수도 있다. 어딜 가나 어부가 갓 잡은 신선한 해산물이 식탁 위에 밥으로 오르고, 국처럼 와인이 곁들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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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해변의 끝자락 와인 & 타파스 바, 타베르나 두 8 오 80(Taverna do 8 ó 80)에 닿았다. 파도에 반한 서퍼 가렛 맥나마라는 결혼식도 나자레에서 올렸는데, 본 예식보다 중요한(?) 피로연을 여기서 즐겼단다. 오직 그의 취향만 믿고 한참을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쾌재를 불렀다. 장서가의 서가처럼 포르투갈의 지역별 와인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는 게 아닌가. 포르투갈에는 포트와인만 있는 게 아님을 온 벽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와인 리스트도 두툼했다. 보유 와인만 450종에 달했다.

알고 보면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프랑스, 스페인 다음가는 와인 생산국이다. 레드와 화이트 와인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해 식사 때마다 와인을 곁들여도 부담이 없다. 알렌테주 지역에서 만든 레드와인은 어떤 음식에나 잘 어울리고, 다웅 지역의 레드와인은 벨벳처럼 부드럽고 섬세한 맛을 선사한다. 특히 연두 빛깔이나 그린 와인이라는 뜻의 비뉴 베르드(Vihno Verde)는 식전주로 인기다. 달지 않고 탄산이 가미된 산뜻한 신맛으로 입맛을 돋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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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를 흩날리며 서빙을 하는 직원의 추천 메뉴가 착착 테이블 위에 놓였다. 첫 잔은 비뉴 베르드. 와인을 막 따르려는 그에게 한 마디 건넸다.

“원한다면, 와인을 좀 더 따라줘도 돼요. 포르투갈 와인 마시러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거든요”

 그는 1초의 고민도 없이 가득 따르고는 눈을 찡끗 감았다 떴다. 두고두고 보고 싶은 풍경에 들어가 와인 한 잔 홀짝이는 데에서 여행의 의미를 찾는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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