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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에 모더니즘 녹여 ‘제3의 미학’ 추구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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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호 28면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김수영은 모더니즘의 특성을 “고통과 불쾌와 죽음”을 껴안는 미학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지금 인용한 ‘폭포’(1957)를 모더니즘을 구현하는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았다. 모더니즘은 죽음을 창조적 파괴의 원리로 간주한다. 답보와 안정을 배격하고 역동적인 변화의 기회를 가져오는 힘을 죽음충동에서 찾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말로 옮기자면 모더니즘은 “쾌락원칙을 넘어서” 저편의 실재를 열망하는 미학이다. 그러나 ‘폭포’는 단순히 모더니즘만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선비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비정신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 부사였고 임진왜란 때는 진주성 전투를 지휘하다 전사했던 학봉 김성일(1538~93)은 16세기 사림파를 대표하는 선비였다. 직언을 서슴지 않아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 불렸던 그는 1500여 수의 시를 남겼는데, 여기에는 칼의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시퍼런 칼은 마치 선비의 분신과 같아서 때에 따라 울분을 토로하는 대상이기도 하고 자찬과 반성의 거울이기도 하며 맹서(盟誓)의 증인이기도 하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김성일은 어느 날 자제들을 모아놓고 검을 나누어주면서 그 칼을 가지고 의(義)와 이(利)를 단호하게 끊으라고 일갈했다. 사적인 이익을 가차 없이 잘라내고 공적인 의로움을 취하라는 것이다.


 선비정신 한가운데 죽음충동 꿈틀거려이런 일화가 말해주듯 선비정신의 한가운데는 칼로 대변되는 죽음충동이 꿈틀거리고 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대의를 위해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 선비정신 아닌가. 그런 선비정신을 가리켜 보통 꼿꼿하다고 한다. 곧음(直)은 의로움(義)과 더불어 선비정신을 정의하는 핵심적 요소다. 『논어』(12:20)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통달했다는 것은 본바탕이 곧으면서 의로움을 좋아한다는 것이다(夫達也者, 質直而好義).” 이때 통달은 헛된 명성과 대비되는 말로 참된 선비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가리킨다. 공자는 통달의 의미를 풀이하면서 선비정신의 주관적 조건이 곧음일 때, 그것의 객관적 조건이 의로움에 있음을 암시한다.


『주역』(곤문언전)에도 “군자는 경건함을 통해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움을 통해 외면을 반듯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말이 나온다. 유가철학에서 직(直)과 의(義)는 함께 짝을 이루는 개념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경매시장에서 고가에 낙찰되어 화제를 모았던 정약용의 ‘하피첩’(霞?帖·다산이 강진 유배시절 멀리 떨어진 가족에게 보낸 서첩)에서도 가장 빛나는 글씨는 ‘직내의방(直內義方)’이라는 네 글자다. 과거의 선비들이 가슴에 새기고 새긴 말이 곧음과 의로움임을 알게 해주는 징표다.


그러나 선비정신은 사적인 이익이나 욕심 앞에 무력해지기 쉽다. 사적인 욕심은 곧았던 마음을 비뚤어지게 한다. 사적인 이익은 공정한 질서를 엉클어지게 만든다. 사리사욕은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것이므로 그것을 끊어낸다는 것은 생명을 버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김성일이 칼을 분신처럼 늘 가까이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곧은 마음과 공적인 대의를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논어』(19:1)에는 “선비가 위험한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고 이득이 되는 것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한다(士, 見危致命, 見得思義)”는 말이 있다.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묵 중에 ‘견리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라는 글씨는 이 구절에서 왔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도 역시 선비정신으로 무장했음을 말해주는 사례다.


 

동서의 전통 교차시켜 정돈의 효과 유도“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꼿꼿한 선비정신은 해방 이후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김수영의 작품세계에서도 반향을 얻는다. 4·19 이후 김수영은 저항시인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그의 참여정신은 이미 그의 핏줄에 흐르던 선비정신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수영이 시인으로서 보여준 위대함은 무엇보다 선비정신을 모더니즘과 마주 세워 동서의 전통을 횡단하는 제3의 미학을 추구했다는 데 있다. 동서의 전통을 교차시켜 어떤 상호 정돈(중용)의 효과를 유도하려던 김수영의 의지는 ‘모르지?’(1961) 같은 시에서 잘 나타난다.


“이태백이가 술을 마시고야 시작(詩作)을 한 이유/ 모르지?/ 구차한 문밖 선비가 벽장문 옆에다/ 카잘스, 그람, 슈바이처, 엡스타인의 사진을 붙이고 있는 이유/ 모르지?”


카잘스, 그람, 슈바이처, 엡스타인은 각각 당대를 풍미하던 서양의 음악가·과학자·의사·조각가다. 모더니즘을 대변하는 이런 인물들의 사진을 “구차한 문밖 선비가 벽장문 옆에다” 붙이는 이유는 무얼까? “모르지?” 아마 이태백만을 따라가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서양의 문화에 취하여 그게 우리의 미래라고 외치는 사람도 모를 것이다. 무조건 전통에 집착하는 사람도, 무조건 전통을 내던지는 사람도 모를 것이다. 왜 선비의 낡은 벽장문 옆에다 첨단 문화의 얼굴들을 붙여놓는 이유를. “모르지?” 이렇게 묻는 김수영은 자신의 시들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한다. 가령 ‘장시2’(1962)를 보자.


“먼 데로 던지는 기적소리는/ 하늘 끝을 때리고 돌아오는 고무공/ 그리운 것은 내 귓전에 붙어있는 보이지 않는 젤라틴지(紙)/ ―나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재산처럼/ 외계의 소리를 여과하고 채색해서/ 숙제처럼 나를 괴롭히고 보호한다.”


이 시는 도시 변두리의 시금치 밭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거기에는 분뇨를 거름으로 뿌려서 파리가 들끓고 있다. 낙후한 당대의 현실을 있는 드러내는 장면이다. 반면 먼 곳을 지나가는 기차는 서양에서 온 선진 문명의 상징이다. 그 기차의 기적소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고무공처럼 시인의 귀를 아프게 때린다. 그때 시인은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재산”을 생각한다. 그 소중한 재산은 “내 귓전에 붙어있는 보이지 않는 젤라틴지”다. 그 투명한 기름종이는 “외계의 소리를 여과하고 채색해서” 시인의 귀를 보호한다.


 세포막, 에너지 왜곡, 선택해 내면 방어김수영이 선비정신으로 돌아가서 서양의 문화와 마주하는 이유는 여기서 찾아야 한다. 그 이유는 외계의 첨단 문화를 당대의 현실에 맞도록 여과하고 채색하기 위한 보호막을 찾겠다는 의도에 있다. 사실 생명체는 외부의 에너지를 흡수하되 그 에너지의 자극에 의해 파괴되지 않아야 한다. 세포의 수준에서 그런 이중의 필요성을 감당하는 것은 세포막이다. 세포막은 외부의 에너지를 끌어들이되 그것을 왜곡, 선택하여 세포의 내면을 방어한다. 생명체의 모든 기관(가령 소화기관이나 감각기관)은 그런 세포막이 분화되어 발달한 결과인지 모른다. 김수영의 ‘장시2’는 생명의 탄생과 유지에 필수적인 보호막을 “무감각한 비애”라 부른다.


“구슬픈 어른들/ 나에게 방황할 시간을 다오/ 불만족의 물상을 다오/ 두부를 엉기게 하는 따뜻한 불도/ 졸고 있는 잡초도/ 이 무감각한 비애가 없이는 죽은 것.”


표면조직의 무감각한 비애가 없다면 생명체는 외부의 자극에 함몰되어 형체를 잃어버릴 것이다. 강렬한 자극에 노출되는 피부일수록 애처롭도록 무감각해야 한다. 농부가 웬만한 상처를 무시하고 거친 일에 전념할 수 있는 것도 두텁고 무딘 손발 덕분이다. 생명체는 적절한 외피를 갖추어야 환경에 자유롭게 거처할 수 있다. 김수영의 시학은 정확히 이런 논리를 따른다. 뒤떨어진 한국문화는 외계의 힘에 열려있되 선비정신을 통해 그 힘을 여과하여 내부의 자생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사실 낙후한 나라의 시인이 모더니즘을 가감 없이 받아들인다면, 그것을 추동하는 죽음충동에 의해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역사적 전통에 대한 무차별한 부정을 자신의 운명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다. 선비정신도 역시 어떤 죽음충동의 주위를 맴돈다. 하지만 그 충동은 허무주의적 부정과는 무관한 긍정적 에너지의 원천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인(仁)이라는 사랑의 힘과 함께 가는 파괴적 충동이다.


 중용의 지혜를 “무감각한 비애”로 표현『중용』(10)에서 공자는 강함의 의미를 묻는 자로에게 남방의 강함과 북방의 강함을 나누어 설명한다. “남방의 강자는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으로 교화하고 무도한 행위에 보복하지 않는다(寬柔以敎, 不報無道, 南方之强也). 북방의 강자는 창검과 갑옷을 깔고 죽어도 미련조차 두지 않는다(?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공자는 진정으로 강한 힘은 이런 남과 북의 힘이 활력적 조화를 이루는 중용에 있음을 강조한다. 선비정신은 죽음을 불사하는 북방의 기개만이 아니라 부드러운 포용력을 추구하는 남방의 교양을 동시에 아우른다는 것이다. 공자는 남북의 힘이 중용에 도달한 상태를 일러 “화합하되 휩쓸리지 않는다(和而不流)” 했고 “중심에 서되 치우치지 않는다(中立而不倚)” 했다. 김수영은 이런 중용의 지혜를 “무감각한 비애”로 표현했고, 그 비애 안에서 서양의 모더니즘을 변형하려 했다. 이런 전략적 의지는 ‘거리1’(1955)에서도 잘 드러난다.


“쇠라여/ 너는 이 세상을 점으로 가리켰지만/ 나는/ 나의 눈을 찌르는 이 따가운 가옥과/ 집물과 사람들의 음성과 거리의 소리들을/ 커다란 해양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조그마한 물방울로/ 그려보려 하는데/ 차라리 어떠할까/ ―이것은 구차한 선비의 보잘 것 없는 일일 것인가.”


점묘화법의 창시자인 쇠라(1859~91)는 서양의 분석적 사유의 대변자다. 선비가 대변하는 것이 중용의 지혜라면, 중용의 지혜는 극단들 사이의 역설을 해소하고 거기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창조적 종합의 역량이다.


우리는 지금 동서의 논리가 충돌하고 남북의 힘이 갈등을 일으키는 심각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런 시기일수록 중용의 지혜로 돌아가 새로운 정신적 피부를 갖추는 과제는 (김수영의 ‘장시2’에 나오는 말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숙제처럼” 다가온다.


김상환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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