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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위한 133일의 사투…'오삭둥이' 희망이의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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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국내 초미숙아 27명 중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희망(왼쪽)이, 찬란이(가명·오른쪽)가 11일 오후 대구가톨릭대병원에서 나란히 앉았다. 아이들의 부모는 이날 병원을 찾아 생명을 지켜준 의료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병원 측은 이날을 '기적을 이룬 날'이라는 의미로 '미라클 데이'로 정했다. 사진 프리랜서 공정식

남들보다 세상을 더 빨리 구경하고 싶었던 것일까. 성인 손바닥만 한 체격, 계란 크기의 머리 형체만 겨우 갖췄을 뿐이었다. 다문화 가정 아이인 희망이(여). 2014년 12월4일 필리핀인 엄마 뱃속에서 155일 만에 태어났다. 정상 분만 기간(280일)의 절반을 조금 넘게 채운 오삭둥이다.

출생 당시 체중은 470g. 신생아 평균 체중인 3.21㎏의 6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생후 7일째엔 스마트폰 무게 정도인 380g까지 떨어졌다. 희망이 없다고 고개를 젓는 이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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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진은 생후 4일째에 찍은 희망이(위)와 찬란이 모습. [사진제공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

그러나 희망이는 이름처럼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133일간 사투를 벌였다.혼자 호흡을 하지 못해 폐 표면을 보호하는 활성제를 맞고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젖을 빨 힘조차 없어 코에 넣은 튜브를 통해 모유와 미숙아 분유를 섞은 젖을 먹었다. 엄마 품에 안겨 체온을 유지하는 신생아 치료 행위인 '캥거루 케어'까지 병행했다. 망막 혈관에 이상이 생겨 레이저 시술을 받기도 했다. 말 그대로 죽을 고비의 연속이었다.

한국말이 서툰 희망이 엄마는 "사랑해"라며 희망이 곁을 지켰다. 아이의 이름처럼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하루하루 성장했고 여러 고비를 잘 이겨냈다. 결국 지난해 4월15일 체중 3㎏으로 당당히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37주 이전 출생아는 미숙아로 본다. 희망이처럼 25주 미만 출생아는 초미숙아로 분류된다. 희망이보다 3일 먼저인 152일 만에 태어난 아이가 현재 생존 중인 세계 최고 기록이다. 1987년 캐나다, 2011년 독일에서 출생한 아기들이다. 국내에서는 2012년 서울에서 152일 만에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그러나 출생체중은 희망이보다 많은 490g이었다.

2014년 국내에서 태어난 초미숙아 가운데 희망이와 같은 22주 이하의 초미숙아는 모두 27명이다. 안타깝게도 생존 중인 아이는 희망이를 포함해 단 2명뿐이다. 희망이처럼 기적을 이뤄낸 또 다른 아이가 바로 430g으로 태어난 찬란이(여·가명)다. 찬란이는 2014년 12월9일 157일 만에 태어났다. 찬란이도 폐가 제대로 펴지지 않아 오랜 기간 인공호흡기를 달고 치료를 받았다. 동맥에 문제가 생겨 약물치료에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찬란이 엄마는 "생후 얼마 지나지 않아 뇌실에 출혈이 생기는 다급한 상황도 있었다.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찬란이 부모는 하루에 3시간 남짓 쪽잠을 자면서 찬란이를 돌봤다. 기적은 일어났다. 찬란이는 166일 만인 지난해 5월23일 4㎏ 건강한 아이로 성장해 병원을 나섰다.

희망이와 찬란이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2014년 태어난 생존 중인 유일한 초미숙아라는 사실에다 대구가톨릭대병원에서 같은 달 함께 생존을 위한 사투를 했다는 점이다. 11일 오후 희망이와 찬란이가 대구가톨릭대병원을 찾았다. 새해를 맞아 생명을 지켜준 병원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치료 중인 1500g 미만 다른 미숙아 32명에게 희망을 전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2월 23주 만에 태어나 희망이와 찬란이처럼 생존이라는 기적을 이뤄낸 윤준호군도 동행했다.

병원에서 만난 희망이는 6.7㎏으로 옹알이를 하고 엄마와 눈을 맞추는 등 건강한 모습이었다. 6.9㎏이 된 찬란이도 포동포동한 모습으로 엄마 품에 안겨 활짝 웃었다. 어둠의 그림자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준호군은 공교롭게도 병원을 찾은 이날이 생일이었다.

희망이와 찬란이, 준호를 치료한 김우택(60)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현대 의학에서 임신 주기 23주(161일)를 생존 한계로 본다”며 “이보다 전에 태어나면 장기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생존 확률이 극히 희박한데 다행히 아이들이 모두 건강하게 자라줬다”고 말했다. 대구가톨릭대병원은 아이들이 찾은 2월11일을 '미라클 데이'로 정해 매년 이날을 기념하기로 했다.

대구=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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