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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년만에 한국인 된 '임실치즈 아버지' 지정환 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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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신부는 김치의 나라에서 치즈로 기적을 일으켰다. ‘임실 치즈’의 아버지 격인 지정환(85·본명 세스테벤스 디디에) 신부 얘기다. 지 신부가 4일 법무부로부터 국적 증서를 받으면서 법적으로 진짜 한국인이 됐다. 한국에 온지 57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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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지정환 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지 신부는 벨기에 귀족가문의 막내로 태어났다. 1958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이듬해 한국행 배에 올랐다. “전쟁의 땅이 희망을 품게 하자”는 이유였다. 첫 부임지인 전북 부안에서 그는 바닷물을 막아 여의도보다 두 배 넓은 간척지를 만들었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농지로 나눠줬지만 고리대ㆍ노름으로 그 땅들이 다 넘어가는 걸 보며 상처를 받았다. "다시는 한국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리라." 지 신부는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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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본당 주임신부 시절. [명인문화사 제공]

하지만 목자(牧者)의 선한 오지랖이 어디 가겠는가. 64년 두번째 부임지인 전북 임실에서 가난이 일상인 농민들을 만났다. 임실이 가진 자산은 초록의 들판 뿐이었다. ”이번엔 아주 조금만 개입하자“는 마음으로 산양 두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산양유를 치즈로 만들어 농민들의 자활 기반을 마련하자는 생각이었다. 막상 일을 시작하니 오기가 생겼다.

벨기에 부모님으로부터 2000달러를 받아 치즈공장까지 지었다. 말만 공장이지 흙벽돌을 쌓고 땅굴을 발효실로 만든 허름한 시설이었다. 약탕기와 막걸리 누룩까지 동원했지만 3년 넘게 실패만 했다. 이탈리아까지 견학을 다녀온 끝에 69년 치즈 생산에 성공했다. 한국에서 만든 최초의 치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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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호텔로 임실치즈를 납품하고 치즈를 확인받는 모습. [명인문화사 제공]

미군부대에서 불법유통되는 치즈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농민들이 정성껏 만든 임실치즈는 서울의 특급호텔까지 유통망을 넓히며 승승장구했다. 72년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 국내 최초로 생긴 피자 가게에 공급된 모짜렐라 치즈도 지 신부의 작품이었다. 공장 규모도 커지고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현재 임실치즈가 지역사회에 끼치는 경제효과는 1000억원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적으로 임실치즈피자 프랜차이즈 업체만 20여개, 임실치즈를 쓰는 브랜드만 70여개다. 임실이 ‘한국 치즈의 본고장‘으로 떠오른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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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순 주교 구속 및 인혁당 사건과 관련한 투쟁 중 체포되는 지정환 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지 신부는 시대의 불의에 맞서 목소리도 열심히 냈다. 70년대 다른 외국 선교사들과 함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에 동참해 중앙정보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 돼 강제 추방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농촌 발전에 관심이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임실 치즈로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신부”라는 보고를 듣고 추방 명령을 거뒀다고 한다.

5·18 민주화운동 때는 시민군들에게 나눠 줄 우유를 트럭에 싣고 혼자 광주로 내려갔다. 당시 경찰들을 만나면 '지정환'이란 자신의 이름이 "정의가 환히 빛날 때까지 지랄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하던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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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복지사목에 힘쓴 지정환 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앞만 보고 너무 열심히 뛰었던 탓일까. 지 신부는 1970년대 초반부터 오른쪽 다리에 다발성신경경화증을 앓기 시작했다. 신체 기능이 조금씩 마비되는 병이었다. 그때부터 지 신부는 목발과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다. 3년 간 병치료를 위해 벨기에로 돌아갔다가 84년 귀국한 뒤 중증 장애인의 뒷바라지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같은 장애인으로서 그들의 고통과 기쁨에 동참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임실치즈공장은 주민 협동조합으로 변경한 뒤 운영권·소유권을 조합에 전부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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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를 집전하는 지정환 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84년 지 신부는 전북 완주군에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 ‘무지개 가족’을 설립했다. 그는 이곳에서 누워지내야만 하는 중증 환자들의 욕창 치료와 운동 재활에 힘썼다. 이곳을 거쳐 현재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장애인만 수백 여명에 이른다. 그가 집전하는 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서 이뤄진다. 장애인이든 아니든 지병이 있든 없든 미사 도중엔 누구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설 수 없는 장애인들이 창피함을 느끼는 걸 배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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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상 시상식에서. [명인문화사 제공]

20여년에 걸쳐 중증 장애인을 치유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 신부는 2002년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지 신부는 이때 받은 상금 1억원과 사재를 털어 장애인을 위한 ‘무지개장학재단’을 세웠다. 2007년부터 매년 장애인 학생 20~30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지금은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에 ‘별아래’라는 집을 지어 무지개가족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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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50주년을 맞은 지정환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4일 법무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적 증서 수여식에서 천노엘(83·오네일 패트릭 노엘) 신부도 지 신부와 함께 국적 증서를 받았다. 아일랜드인인 천 신부는 81년부터 지적 장애인·봉사자가 함께 생활하는 소규모 가족형 거주시설인 ‘그룹홈’을 운영해 온 공로를 인정받았다.

국적법은 2012년부터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외국인’에 대해 특별귀화를 허가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인요한(57)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 2012년 3월 처음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번 특별귀화로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이 된 외국인은 7명이 됐다.

김현웅 법무부장관은 “지역 경제 발전과 장애인을 위한 두 분의 헌신적 활동에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사랑과 나눔의 문화가 우리 사회에 정착되어 더욱 따뜻한 사회가 되도록 많은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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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열린 국적증서 수여식. 왼쪽부터 신혜경 원장 수녀, 김현웅 법무부장관, 천노엘 신부. [법무부 제공]

이날 지정환 신부는 수여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지 신부가 최근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탓에 신혜경(58) 원장 수녀가 경기도 과천으로 올라 와 증서를 대리 수상했다. 본지는 국적 증서 수여식 며칠 전부터 지 신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언론에) 마치 내가 영웅처럼 다뤄지는 게 싫다"는 거였다. e메일로만 답변을 받는 조건으로 가까스로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아래에 그 원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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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완주의 ‘별아래’에서 지정환 신부. [법무부 제공]

57년 만에 법적으로 한국 사람이 되셨습니다.
“법무부에서 특별한 배려로 저를 특별공로자로 인정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주신다니 기쁩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저를 한국사람으로 인정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정말 좋은 선물입니다.”
신부님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어떤 의미인가요.
 ”벨기에에서 외방선교 신학교(선교목적의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한국은 저의 고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부임지인 부안은 제겐 첫사랑같고 두 번째 부임지인 임실은 제게는 고향입니다. 임실에 부임했을 때 “천주교 신자 뿐만아니라 임실 군민 전체에게 뭔가 하나쯤은 꼭 남겨달라는 임실군수(문필병)의 한마디가 지금의 임실치즈를 만들었습니다. 한국은 제게 고향이자 가족이 있는 곳입니다. 신랑ㆍ신부가 결혼하면서 영원히 함께 하자고 약속하듯 저 또한 한국과 영원히 함께 하고자 합니다.“
이제 임실치즈와 관련된 일은 안하시나요.
 ”저는 그저 성직자일 뿐입니다. 현재 일하고 있는 사람들(후임자)이 편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제가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임실치즈축제를 다녀왔는데 축제기간 중 10만명 이상이 방문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시간낭비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최근 건강이 나빠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지난해 1월 17일경 집에서 갑자기 쓰러진 이후 말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 이후 치과 치료, 백내장 수술등 병원을 찾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치즈공장가족, 무지개가족, 장학재단가족 등 나에게는 수많은 가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국에서의 모든 일을 모두 잘 시작했고, 결국은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난 또 행복한 사람입니다.”
곧 민족의 명절인 설입니다. 설을 맞아 장애인 및 소외계층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있으신지요.
 ”지금 할 수 없는 것, 없어진 것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고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면서 세상으로 더 밝게 뻗어 나가길 희망합니다.“
앞으로 이 땅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으신지요.
 ”요사이 무지개 가족에서 함께 생활했던 분들의 사망 소식을 자주 접합니다. 그럴 때마다 무지개 가족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셨던 분들이기에 ‘장애로부터 해방되어 천국으로 가시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슬프지만 기쁜소식이지요! 비온 뒤 청명한 하늘에 기다리면 나타나는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장애인들이 세상으로 더 밝게 뻗어 나가길 희망합니다. 저는 한국에 올 때 이미 한국과 영원히 함께 하길 마음속으로 약속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제 신부가 죽으면 모두 화장(火葬)을 합니다. 아마도 제가 죽게 되면 화장(火葬)하여 천주교 ’천호성지‘로 가겠지요!”

장혁진 기자 analo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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