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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위원회’ 이끌던 구용서, 조선은행 실세로 떠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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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호 20면

백두진 국무총리. 황해도 출신이었으나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목포 등에서 근무했다. 이런 배경으로 해방 직후 중국과 이북에 흩어진 조선은행 직원들을 모으는 역할을 맡아 초창기 한국은행 인맥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은행을 떠나서는 재무장관·국회의원·국무총리·국회의장 등을 역임했다. [중앙포토]

윤동주 시인의 시 ‘참회록’은 창씨개명의 자괴감을 담은 작품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일본 유학 앞두고 이름을 바꾸기 닷새 전에 참담한 심정을 담았다.


창씨개명은 ‘조선과 일본의 완벽한 동화’를 위해 이토 이로부미(伊藤博文)가 구상한 것이지만, 워낙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30년이 지난 1939년에 이르러서야 법제화됐다.(조선총독부 제령 제19호)


이후 똑똑한 젊은이들이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을 감수해야 했다. 유학준비생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오주(平沼東柱)로, 목포상고의 김대중은 도요타 다이주(豊田大中)로, 만주 대동학교의 최규하는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로 바꿨다.


조선은행의 경우 도쿄 상대(현 히도쓰바시 대학교)를 졸업한 구용서(훗날 총재)와 백두진(훗날 국무총리)은 각각 구하라 이치로(具原一郞)와 시라카와 미노루(白川?)로 직원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오사카 상대(大阪 商大) 출신의 천병규(훗날 재무장관)는 유키다 게이이치(千田圭一), 후쿠시마 고상(福島 高商) 출신의 신병현(훗날 부총리)은 히라야마 에지로(平山榮次郞), 오이타 경전(大分 經專) 출신의 김정렴(훗날 재무장관)은 타마이 마사토(玉井正人)로 신고했다. 창씨개명한 그들은 일본인처럼 대리 승진이 예약되어 있었다.


반면 단순 잡역이나 사무보조원, 그리고 조선에서 교육을 받은 행원들은 창씨개명을 요구받지 않았다. 선린상고 출신의 장기영(훗날 한국일보 창업주)과 평양상고 출신의 유창순(훗날 국무총리)이 그 예였다. 그들은 아무리 학교성적이 우수하고 일을 잘하더라도 대리가 되기는 어려웠고, 일본인 상사들은 이들 현지채용 직원의 이름에 신경 쓰지 않았다.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에서 거행된 미국 하지 중장과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조선총독 간의 항복문서 조인식. 조선총독부는 이날까지 치안과 행정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소련군, 조선은행 금고 열고 현금 강탈이름만으로도 학력과 갈 길이 드러났던 질서는 해방과 더불어 무너졌다. 특히 소련군이 점령한 북조선에서는 구질서를 무조건적인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다. 1945년 8월 24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군은 이틀 뒤 조만식(曺晩植) 선생을 들러리로 세워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라는 임시 연립정권을 세우고 그 이튿날부터 조선은행의 영업과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전면 금지시켰다. 소련군이 발행하는 군표로 세상을 바꾸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어 치챠코프 소련군 총사령관은 열흘 만에 당초의 명령을 철회했다. 돈이 부족한 소련 점령군은 결국 조선은행으로 달려가 금고문을 열고 현찰을 강탈하거나 대출을 강요했다. 9월 23일 ‘북조선 중앙은행’을 설립한 뒤에는 소련군과 김일성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금융의 문외한들에게만 요직을 맡겼다. 조선은행원들은 금융의 전문성과 질서가 완전히 파괴되는 사태에 경악하며 짐을 꾸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를 피해서 미국으로 몰려든 유태인 과학자들이 히틀러가 미국에 준 선물이라면, 서울로 몰려든 조선은행의 인재들은 소련과 김일성이 남조선에 준 선물이었다. 10월 중순 평양지점의 유창순이 출장을 가장하여 서울로 줄행랑을 친 뒤 김유택(훗날 재무장관)과 김성환(훗날 한국은행 총재)이 뒤를 이었다. 일본인 상사들로부터 청진지점을 접수한 장기영과 신의주지점을 접수한 신병현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한국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이들 이북 출신들은 서울로 내려와 후암동 사택촌(현재 한국은행 기숙사 주변)에서 금융 블록을 이루면서 똘똘 뭉쳤다.


그러나 조선은행에는 남조선 출신의 엘리트들도 많았다. 부산 출신인 구용서가 그 중심이었다. 그는 지배인까지 승진했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대리로 부당하게 강등된 경력도 있었기 때문에 이북 출신 직원들도 존경을 표했다. 구용서는 백두진·천병규·신판국(게이오대학 졸업, 훗날 상업은행장)·진강현(츄오대학 졸업, 훗날 광주은행장) 등 일본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자치위원회’라는 기구를 이끌었다. 이 기구는 해방 직후 일본인 상사로부터 업무를 인계받고 그들이 출국할 때까지 감시하는 기구로 출발했으나 이후 조선은행의 인사·조직·예산을 지휘하는 실세로 부상했다. 그런 속에서 구용서를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위계서열이 자리 잡았다.


남한 금융은 미 육군 중령이 좌지우지해방과 더불어 롤랜드 스미스 미 해군 소령이 조선은행의 새 총재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은행업을 잘 몰랐고 출근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반공이념이 투철한 조선은행 직원들의 집단지도체제를 상당 수준 인정해 주었다. 하지만 자치위원회의 자율은 어디까지나 내부경영에 한정됐고, 대출업무에는 미 군정청이 강하게 개입했다.


미 군정청은 1945년 9월 9일 입법·사법·행정을 총괄하던 조선총독부를 해체하면서 설치됐다. 10만원 이상의 거액 대출을 일일이 승인했던 조선총독부의 권한은 이후 군정청의 재무국장인 찰스 고든 육군 중령에게 넘어갔다. 조선은행 간부들은 출근길에 스미스 총재가 아닌, 고든 국장을 만나 “군정이 대출을 보증한다”는 쪽지와 함께 특정 기업 대출을 지시받았다. 이런 실상이 알려지면서 ‘쪽지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한남동 미군 부대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


당시 고든 국장은 남조선 금융계의 최고 실력자였다. 미 군정청이 동결한 남조선 내 일본인들의 재산도 그가 관리했다.(군정청령 제33호)


소위 ‘적산기업 불하(敵産企業 拂下)’를 바라는 사업가들은 고든에게 줄을 대기 바빴다. 남조선에서 고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민족자본의 상징이라고 알려진 조흥은행의 정운용(鄭雲用)행장이었다. 설립자인 할아버지로부터 경상합동은행장을 물려받은 그는 일본인의 지분 참여를 거부하여 조선총독부의 미움을 샀다. 이로 인한 경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한성은행과 합병했으나 조선총독부가 이를 그냥 두지 않고 다시 동일은행과 강제 합병시켰다. 이렇게 출범한 조흥은행의 은행장은 일본인이었는데, 해방 후 고든 재무국장이 그를 해임하고 새 행장으로 정운용을 임명했다.


중앙은행 설립 놓고 조흥은행과 대립 정운용은 고든에게 “일제하에서 민족자본에 의해 세워지고 조선인의 손에 커온 은행은 조흥은행 밖에 없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 결과 조흥은행이 적산관리 대행계약을 따냈다(1945년 12월). 본국으로 귀환한 일본인 직원이 가장 적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인이 유난히 많았던) 조선은행도 청산되어야 할 적산”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중앙은행 자격을 두고 조흥은행이 조선은행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당연히 조선은행 직원들은 경악했다. 훗날 백두진은 그 도전을 분반사(噴飯事) 즉, 먹던 밥을 토할 일이라고 회고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조흥은행은 중앙은행이 되기에 너무 작았다. 당시 일반은행은 조흥은행·상업은행·조선저축은행(훗날 제일은행)·조선신탁주식회사(훗날 한일은행) 등 4개에 불과했다. 이들의 대출액을 다 합해도 조선은행의 8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직원들의 자질과 경험도 변변치 않았다. 그러나 고든과 정운용의 사이가 워낙 각별하여 쉽게 예단할 수 없었다.


1947년이 되자 중앙은행 자격을 둘러싼 공수(攻守)의 판도가 바뀌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앞서서 조선인이 정부 운영의 경험을 쌓기 위해서 미 군정청이 남조선 과도정부를 출범시킨 것이다. 그동안 ‘쪽지 대출’로 잡음이 많았던 고든 재무국장이 물러나고 윤호병(尹?炳) 재무장관(훗날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이 취임했다.


윤호병은 일본에서 공부한 최초의 조선은행 직원이었고, 조흥은행과 경쟁하는 조선상업은행의 은행장을 거쳤다. 따라서 조흥은행에 중앙은행 자격을 부여할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윤호병은 “소비만 자극하는 불건전 대출을 방임했다”는 이유로 정운용을 해임했다. 조선은행을 멍들게 한 ‘쪽지 대출’의 배후로 그를 의심한 것이다. 이후 중앙은행 설립 논의에서 조흥은행은 잊혀졌다.


새 나라의 중앙은행을 이끌 사람들은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에 몰려 있었다. 일본에서 정식으로 경제학을 배운 엘리트들이 앞 다투어 두 은행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비록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공부를 위해 이름을 포기할 때는 윤동주처럼 괴로워했다. 그들이 자괴감을 무릅쓰고 창씨개명한 이유는 일본인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뛰어난 학업성적을 통해 그 실력을 증명했다.


조선과 일본에서 명석함이 입증된 그들은, 남에게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이끄는 세상을 꿈꿨다. 마침내 그런 기회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hyeonjin.cha@b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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