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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13명이 모두 주인공 … 그 합의 미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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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호 16면

‘3천만배우’ 황정민의 연출과 출연으로 화제가 된 연말연시 공연시즌 유일한 신작 뮤지컬 ‘오케피’(2월 28일까지 LG아트센터)는 독특한 무대다. 노래와 춤이 있는 뮤지컬 형식이면서 ‘백조의 발’같은 오케스트라 피트 속에서 화려한 뮤지컬 세계를 사정없이 비꼰다. 그러면서 원작자는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이나 모두 만족할 만한 뮤지컬’이라 선언한다. 대체 어떤?무대길래?


원작자가 일본의 ‘희극지왕’으로 통하는 작가 겸 연출가 미타니 코키(三谷幸喜·55)라는 걸 알면?수긍이 간다.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연극 ‘웃음의 대학’ 등에서 보여준 특유의 작품세계가 그대로 녹아있다. 이 무대에서 뮤지컬 이야기는 표면일 뿐이고 오케스트라 피트는 연극적 공간을 위한 설정일 뿐이다. 사소한 애정문제로 이어가는 시추에이션 코미디인척 평범한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휴먼드라마다.


이 무대엔 앙상블이 없다는 게 핵심이다. 대극장 뮤지컬에서 들러리를 서는 20~30명의 이름없는?앙상블도 각자 삶의 주인공인 것처럼 ‘오케피’ 속에서 그저 ‘바이올린’ ‘퍼커션’ ‘피아노’라는?악기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 아니 어딘가의 일터에서 소소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도 나름 제 위치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소중한 사람들이란 은유일까. ‘오케피’ 속에서 ‘트럼펫’으로?불리는 동갑내기 배우 김재범(37)과 최재웅(37)을 만났다.


“완전 싫어 뮤지컬. 왜 갑자기 노래를 부르냐고. 간단하게 말로 하면 30분이면 끝나는 별거 아닌 이야기~”


코트 자락 펄럭이며 등장한 훤칠한 남자가 확 깨는 ‘병맛’ 안무와 함께 뮤지컬을 ‘셀프 디스’하는 솔로곡을 부르면 객석은 자지러진다. 이 남자는 늘 술에 쩔어 있지만 마성의 매력을 지닌 카사노바 ‘트럼펫’.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왠일인지 여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옴므 파탈’ 캐릭터다.


사실 ‘트럼펫’은 황정민 연출이 찜해 놓은 배역이었다. 대본을 본 남자배우들이 모두 탐을 내 가장 경쟁이 치열했던 배역이기도 하다. 제작 여건상 황정민이 ‘컨덕터’ 역을 맡게 되면서 결국 낙점된 두 사람은 알고 보니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한 무대에서 형사와 용의자로 만난 적은 있지만 둘이 더블캐스팅은 처음이에요. 어땠냐구요? 그냥 하는가 보다 했죠.”(최재웅)


“나쁠 건 없죠. 얘가 만든 캐릭터 묻지도 않고 아무 거리낌 없이 쓸 수 있고? 안 친하면 그 사람이 만든 걸 하기가 좀 그렇거든요.”(김재범)


18년 묵은 두 친구는 결코 서로 띄워주거나 형식적인 멘트를 날리지 않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동기로 4년 내내 하루종일 붙어 다녔던 ‘절친’이기에 서로가 배우 이전에 ‘내 친구’로 보일 뿐이라고 했다. 작품이나 연기에 대해서도 굳이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말이 필요없는’ 사이인 것이다. 둘은 “우린 혈액형도 같고 성격이 정말 비슷하다. 우리가 연기하는 ‘트럼펫’도 그냥 똑같다고 보시면 된다”고 입을 모았다.


분위기는 전혀 다른데요. 재범씨가 훨씬 코믹해 보여서 코미디 연기가 더 수월하겠어요.김: 그렇지 않아요. 외모에서 풍기는 것 때문에 그렇지, 이 친구도 굉장히 웃기는 녀석이에요.최: 코미디지만 웃기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밸런스가 중요하죠. 일상적인 내용으로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어려운 작품이에요. 다른 작품은 주인공도 뻔하고 그냥 다 보이잖아요. 대본 처음 봤을 때 가장 좋았던 게 밸런스예요. 누구 하나 튀지 않게 정말 잘 썼죠. 이런 작품이 우리나라에 잘 없는데, 그게 제일 매력적이었어요.


‘트럼펫’은 속사정이 감춰진 미스터리한 남자인데, ‘마성의 매력’의 정체가 뭘까요.김: ‘넌 네 생각만 하지. 난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알아’라는 대사가 있죠.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아줘서 그런 것 같아요. 다른 멤버들이 할 말도 못하고 배우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불만이라 앞장서서 뮤지컬을 비난하기도 하고. 최: 얘기를 잘 들어주니까 그런 것 같아요. 저희 실제 성격도 그런 편이에요. 저희가 말을 잘 못해서 잘 들어주거든요.(웃음)

뮤지컬 ‘오케피’중에서 김재범

아무도 튀지 않아야 사는 뮤지컬‘오케피’는 황정민이 2008년 미타니 코키의 연극 ‘웃음의 대학’ 출연 당시 미타니 작품세계에 반해 직접 물색한 뮤지컬이다. 당시 뮤지컬 연출을 꿈꾸던 황씨는 연극적이면서도 따뜻한 감동이 있는 ‘오케피’를 꼭 우리 관객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했다.


하지만 여정은 험난했다. 자기 작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미타니가 “최고의 극장에서 최고의 배우를 쓰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고, 우리 현실에 맞게 각색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5년에 걸쳐 무수한 피드백을 주고받은 결과 원작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일본색을 지운 대본이 탄생했고, 최고의 극장 LG아트센터 대관과 주연급 배우들이 대거 포진된 ‘어벤저스’급 호화캐스팅을 완성했다.


등퇴장이 있고 주조연과 앙상블이 구분되는 여타 뮤지컬과 달리 모든 배우가 주연이자 조연이자 앙상블인 상황.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을 다 같이 만들어가야 하는 만큼 두세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연습을 각자 따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전체가 다 있어야 할 수 있는 작품이거든요. 런쓰루를 제일 많이 한 작품이에요. 한달이나 했는데 틀리는 경우가 생기더라구요. 열세명이 동시에 다 진행되야 하니까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죠. 대극장에서 이렇게 여러 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을 같이 하는 공연은 달리 없거든요. 정말 좋은 경험을 한 거죠.”(김)


“배우들 평균 연령이 42세일 정도로 다들 경험이 많아 팀웍도 좋고 많이 배웠어요. 재미있고 웃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연습 땐 난리도 아니었죠. 그런데 웃겨서 재밌는 것보다 연기 합이 맞아 가는 게 재밌더라구요.”(최)


이야기가 너무 소소해서 지루하다는 평도 있는데.최: 저는 그래서 좋았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임팩트가 없는 게 맘에 들어요. 서양 뮤지컬 형식을 따르지 않으니까요. 전부터 왜 그래야만 하는지 생각이 많았거든요. 다른 작품은 감정이 폭발할 때 노래가 나오거나 하는, 우리가 익숙한 룰들이 있잖아요. ‘오케피’는 기승전결 룰조차 따르지 않고 뒤죽박죽이죠. 그런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좋았어요.김: 이 작품이 갈등을 고조시키거나 대결구도로 갔다면 진짜 이상했을 걸요. 갑자기 컨덕터가 여배우에게 화가 나 거창한 노래를 부른다든지. 비슷한 뮤지컬이 많지만 우린 좀 다른 뮤지컬인 거죠.

뮤지컬 ‘오케피’중에서 최재웅

갑질하는 윗사람에게 눌려사는 서민 얘기거의 모든 질문에 “친구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며 이심전심을 강조하는 두 사람은 데뷔작도 같았다. 한때 모든 배우들이 ‘워너비’로 꼽았던 ‘지하철1호선’이다. 계원예고 시절부터 뮤지컬 배우를 꿈꿨던 최재웅이 제대후 2003년 먼저 데뷔했고, 그 무대를 본 김재범이 곧바로 오디션을 봐 2004년 무대에 올랐다. “저는 뮤지컬이 뭔지도 몰랐어요. 연기만 알았죠. 얘가 하는 걸 봤는데 ‘지하철1호선’도 굉장히 연극적이잖아요. 그래서 겁 없이 오디션을 봤죠. 만약 굉장히 웅장한 대극장 뮤지컬이었다면 생각 없었을 거에요. 그 작품도 배우들 간에 합이 중요한데, 당시 같이 뽑힌 형들이랑 합이 잘 맞아서 뽑힌 것 같아요.”(김)


황정민 연출은 노래보다 연기를 강조하던데, 뮤지컬은 노래 우선 아닌가요.김: 노래가 우선인 작품도 있지만 이 작품은 연기가 우선이에요. 관객이 보기엔 광기어린 엄청난 연기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말이냐 하겠지만, 13명 배우가 기본적인 ‘주고받기’가 모두 되야 맞아 떨어지는 극이거든요. 그게 안 되면 툭 끊겨버리고 합이 안 생기죠. 그래서 호흡과 연기를 강조하시는 거에요.


요즘 가장 바쁜 배우가 연출을 맡았는데. 최: 우리가 본 연출 중에 제일 열심이었어요. 오후 1시 연습이면 아침 9시부터 나와서 연구를 하고 계셔요. 밤에도 제일 늦게 가시고. 김: 가면 늘 먼저 와 계셔서 놀랐어요. 배우니까 큰 그림뿐 아니라 연기 디테일까지 신경써 주셔서 좋았구요. 본인이 먼저 다 움직여보고 우리에게 제안하시더라구요.


원작자 바람대로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이나 모두 만족할 만한’ 작품이 됐을까요.김: 이 작품은 단순히 오케피 사람들이 모여서 콩닥콩닥 하는 게 아니라 인생 이야기에요. 갑질하는 윗사람에게 눌려 사는 서민들 얘기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힘들어하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발전해 있고. 그런 인생 얘기로 보면 작품이 거대해 보여요. 가사도 음미해 보면 굉장히 좋아요. 행복이 별거냐, 아침햇살 한 줌과 통조림 한 개로도 행복할 수 있다, 그런 메시지가 굉장히 따뜻하게 느껴지죠.최: 각자 이야기의 옴니버스로 볼 수도 있는데, 지인들은 그게 좋았다고 해요. 드럼 대사에 공감하는 사람도, 오보에 노래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죠. 모든 관객이 하나의 짜여진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 게 아니라 각자 볼 수 있는 시각이 넓게 펼쳐져 있어요.김: 누군가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 얘기잖아요. 마지막 20번 노래 부를 때마다 울컥울컥해요. ‘아무리 재미없는 뮤지컬도 꼭 한곡은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는 건데, 지루하고 지친 내 인생에도 즐거운 일 하나는 있다고 들려서 위로가 되요. 정말 그게 인생인 것 같아요.


배우들도 ‘백조의 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나요. 최: 백스테이지에서는 우리도 백조의 발처럼 움직이죠. 이 작품은 커튼콜 준비할 때 딱 한번 단체로 옷을 갈아입는데 무지 바빠요. 김: 오케스트라가 인사하는 동안 얼른 갈아입어야 되는데 뒤에서 노래를 계속 같이 불러줘야 사운드가 맞거든요. 바지 벗으면서 ‘미레미도미솔라~’노래 부르고? 남들이 보면 진짜 웃길걸요.(웃음)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샘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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