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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없이도, 남의 삶을 파괴하는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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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호 22면

일러스트 김옥

처음 읽을 때보다 두 번이나 세 번 읽었을 때 더 좋아지는 소설이 있다. ‘스며든다’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말하고 싶다.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그런 소설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은 스물 몇 살 때보다 세 번째 읽은 지금 나는 인간의 모순된 욕망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진심으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대에게조차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악의 없이도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나는 너의 사촌언니와 자고 싶다. 뇌수가 다 녹아버릴 만큼 섹스하고 싶다. 온갖 체위를 다 이용해서 천 번쯤 하고 싶다. 그건 너와는 어떤 상관도 없는 일이니까, 그다지 마음 쓰지 않길 바란다.”


만약, 당신의 애인이 어느 날 이런 말을 한다면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상대를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는 그 당시의 내게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무엇’인가에 강렬하게 휩쓸려 있고, 그 ‘무엇’ 안에는 내게 소중한 것이 포함되어 있을 것, 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싶었다. 몸이 저리도록 알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그녀의 육체 속으로 손을 쑤셔넣고, 그 ‘무엇’인가를 직접 만져보고 싶다고까지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 ‘하지메’는 첫사랑 ‘시마모토’와 헤어져 있던 시간 동안 몇 명의 여자를 사귄다. 그 중에는 여자 친구의 사촌 언니도 있었다. 자신보다 연상인 애인의 사촌을 보는 순간, 그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성욕을 느낀다. 성욕은 너무나 강렬해서 온몸을 관통하듯 그를 괴롭힌다.


불륜 아닌 불륜 관계에 빠진 이들은 매일 만나 잠을 잔다. 별다른 대화 없이 오직 행위에만 집중하는 몇 날을 보내고 나서도, 서로의 몸을 그리워하며 헤어지는 것이다. 전적으로 몸으로 귀결되는 연애를 통해, 하지메는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자아를 얻는다. 자신이 얼마만큼 악랄해질 수 있는지를 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악이란 ‘악의’를 가지고 행하는 일만 뜻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여자친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남자에겐 없는 여자만의 ‘특별기관’이란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신나라 레코드나 타워 레코드에서 재즈 앨범을 마구 사들이고 있었다. 듣지 않아도 대학시절 재즈 앨범을 사들이곤 했는데, 이유라곤 하나, 하루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낯선 이름의 뮤지션들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악을 행하고 싶지 않아도 악’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어렴풋이 그런 부류의 인간이 존재하며,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될까봐 진심으로 두려웠다. 연애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중요했던 이십대 초반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나는 헤어진 남자친구들의 이름을 술을 마시지 않고도 몇 명쯤 말할 수 있었고, 실연당해 죽고 싶은 마음 역시 얼마간 알게 됐으며, 별다른 이유없이 타인을 죽을만큼 상처입힐 수도,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처받을 수도 있는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다.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과, 듣지 않아도 들리는 것들, 무엇보다 변하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경계 위에 머뭇대듯 멈춰서는 것들에 더 큰 연민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생각도 20대와는 무척 달라져 있었다. 하루키 역시 머리가 훌훌 벗겨져 일흔을 향해 가고 있었고, 나 역시 40대에 진입하고 있었다.


“내게도 옛날에는 꿈 같은 것이 있었고, 환상 같은 것도 있었어요. 하지만 언제인가, 어디에선가, 그런 것들은 사라져버렸어요. 당신을 만나기 전의 일이에요. 나는 그런 것을 죽여버렸어요. 아마도 자신의 의지로 죽이고, 버린 걸 거예요. 필요가 없어진 육체의 한 기관처럼.”


남편 하지메가 결국 첫사랑 시마모토를 만나 한 번 더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의 불륜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게 된 그의 아내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비로소’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불륜이란 고백하기도 전에, 이미 눈치채는 종류의 감정이라 두 사람 사이에 맴도는 팽팽한 긴장감은 이 소설이 띠는 비극적인 색채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하지메의 아내가 하는 말 중 ‘육체의 한 기관’이라는 말을 보다가, 가장 최근에 번역된 하루키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나오는 ‘독립기관’의 어떤 글들이 떠올랐다. 모든 여자에게는 남자에게는 없는 아주 특별한 기관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거짓말을 하기 위한 독립기관이라는 말이었다. 어떤 거짓말을 언제 하느냐는 여자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모든 여자는 살면서 꼭 한 번은, 그것도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일 때문에, 반드시 거짓말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도 사소하게 거짓말을 하긴 하지만, 이때의 거짓말은 다른 사람의 일생을 뒤바꿔 놓을 정도의 거짓말이라는 게 하루키의 전언이었다.


쿨한 척 하다 얼어 죽느니 솔직히 말하고 불타버리리20여 년 전에 읽은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서 가장 최근에 쓴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것, 그것은 오랜 시간 하루키를 읽어온 나로선 꽤 익숙한 경험이었다. 제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해도, 수백 번 동침했던 남자가 좋아했던 체위와 성감대를 정확히 기억해내는 아주 오랜 연인처럼 말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냇킹 콜의 노래를 듣다가, 문득 노래의 가사를 해석해보고 싶어졌다.


“Pretend you’re happy when you’re blueIt isn’t very hard to do(고통스러울 때에는 행복한 척해요. 그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에요)”


하루키의 말대로 어쩌면 그것은 생각하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20대와 30대 내내 내가 고집했던 사랑의 방법론, 가령 고통을 고통이라 말하지 않고, 행복을 행복이라 말하지 않는 위악적인 사랑의 방법론 말이다.


‘쿨한 것’이 강한 사람이 휘두를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했던 치기 어린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 쪽이 한결 더 낫다는 걸 안다. 나라면 쿨한 척 하다가 얼어 죽느니, 솔직히 말하고 불타버리는 쪽을 택하겠다. 완전 연소된 연애에는 미련이 남지 않고, 그런 연애는 틀림없이 다음 연애에 걸림돌이 아닌 자양분이 된다.


행복은 행복으로 말해지는 편이 투명하다. 죄책감 때문에 행복을 불행으로 가장하고, 연민 때문에 불행을 행복으로 가장한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구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어느 순간 하루키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


백영옥 ?광고쟁이, 서점직원, 기자를 거쳐 지금은 작가. 소설『스타일』『다이어트의 여왕』『아주 보통의 연애』 , 인터뷰집 『다른 남자』 ,산문집『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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