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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월남 패망론’ 담화, 41년 전 아버지 데자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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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박근혜 대통령의 13일 대국민담화에서 눈길을 끈 발언들 중 하나가 “월남(越南) 패망”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라면서 “월남이 패망할 때 지식인들은 귀를 닫고 있었고, 국민들은 현실정치에 무관심이었고, 정치인들은 나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참모들이 써온 연설 원고를 본인이 직접 수정하곤 한다. 그런 만큼 대통령이 사용하는 단어는 대통령의 시국관을 투영하는 거울이다. 월남 패망 발언이 단적인 예다.

[이슈추적]
국제경제 위기, 정치 혼란, 북 변수
현재 정부 상황, 1975년과 판박이
곳곳서 아버지 담화와 비슷한 메시지
“현대 민주주의까진 못 미쳐” 지적도

 ‘월남’은 한국처럼 남북으로 나뉜 분단국가였으나 41년 전인 1975년 베트남전에서 공산주의를 표방한 북베트남에 패해 사라진 남베트남 정부를 지칭하는 용어다.

월남이라는 국명부터가 젊은 층에겐 낯선 이름이다. 70년대 중반 베트남의 사회주의화와 2015년 한국이 처한 상황을 비교하는 이유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20~30대도 적지 않다. 반면 베트남전쟁과 미국의 패전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세대에게 박 대통령의 ‘월남 발언’은 체감도가 크다.

 특히 월남이 패망하기 하루 전인 75년 4월 29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TV와 라디오로 ‘월남 패망에 대한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박 전 대통령은 “(월남은) 국론이 통일되지 않았다. 또 국민이 단결돼 있지 않았다. 정치불안과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집안싸움만 하고 앉았다가 결국 패전의 고배를 마시게 됐다”고 강조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박 대통령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74년 서거)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때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41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부녀(父女) 대통령이 던진 메시지엔 ‘데자뷔(deja vu·기시감)’가 있다. 지난해 연말부터 녹음기처럼 정치권과 국회를 비판해 오고 있는 박 대통령의 위기감과 집요함의 원천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41년 전 박 전 대통령은 “부질없이 앉아 갑론을박 토론을 하고 시간을 허송할 때가 아니다”고 했으며, 13일 박 대통령은 “제가 바라는 것은 정치권이 이 순간 국회의 기능을 바로잡는 일부터 하는 것”이라고 했다. 비효율적이고 정쟁만 일삼는 정치권을 몰아붙이는 발언이 닮은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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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대통령은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퍼스트레이디로서 삶은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훌륭한 선생님이었고, 나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국방·외교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다”고도 썼다.

 75년 ‘월남 패망 특별담화’가 나온 때와 현재 정부가 처한 상황은 판박이다. 국제경제 위기(75년 유가 폭등-2015년 중국 증시 폭락), 북한 변수(김일성 주석 방중-4차 북핵 실험), 그리고 정치 혼란기라는 점이다.

41년 전 박 전 대통령은 “국회를 빨리 열어 국정을 정상화해 달라”고 촉구했지만 야당인 신민당은 “유신헌법 개정에 사전 합의하라”며 버텼다. 현재는 박 대통령이 “노동개혁 4개 법안 등을 처리해 달라”고 매일같이 압박하고 있지만 야당은 반대하고 있다.

 결국 남베트남 붕괴란 외교·안보 이슈와 국내 정치를 엮어 내는 아버지의 국정운영을 23세 젊은 나이 때 지켜본 박 대통령이 국정 책임자로서 비슷한 상황에 처하자 ‘월남 패망론’을 들고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통령 담화의 결론도 “전 시민이 이 자리에 나와 사수해야 합니다”(박정희 전 대통령)와 “유일한 대안은 바로 국민 여러분들이십니다”(박근혜 대통령)로 같다.

▶관련기사“월남 패망 때 정치인들 안 나섰다…국민이 나서 달라”

고려대 이내영(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박 대통령은 41년 전 월남과 비교해 가며 ‘정치권이 일을 안 해 문제’란 메시지를 던졌다”며 “하지만 그동안 박 대통령이 국회를 찾아 설득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는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로까지 진화시키지 못한 건 아쉽다”고 했다.

남궁욱·현일훈 기자 periodist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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