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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우리 사회를 조용히 바꾸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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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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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
사회부문 기자

벌을 키워 지구 별을 살리겠다? 처음 들은 도시양봉가 박진(33)씨의 말은 황당했다. 그깟 꿀벌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나 박씨가 풀어놓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잊고 있던 많은 걸 깨닫게 됐다. 먼저 우리가 먹는 100대 농작물의 71%는 벌의 수분 작용이 있어야만 생산 가능하다. 미국 연방정부는 꿀벌의 폐사율이 연간 30~40%에 달하자 지난해 5월 꿀벌 보호를 위한 국가 전략까지 발표했다.

 박씨도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4년 전 주말농장에서 토마토를 키우던 그는 열매가 맺히지 않자 주인에게 물었고, “벌이 없어 그렇다”는 답을 들었다. 몇 달 동안 관련 서적을 뒤져가며 공부해 보니 벌이 없으면 자연생태계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길로 박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도시양봉을 시작했다. 현재 명동·노들섬 등 서울·경기 지역 19곳에서 꿀벌을 키우며 매년 1.5t의 꿀을 수확한다.

 판매한 비누 수만큼 저개발국가 아이들에게 기부되는 ‘1(소비)+1(기부)’ 운동가 정명진(35)씨도 마찬가지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 이들에게 비누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아이티·캄보디아·르완다 등 전 세계 구호 현장을 누빈 정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이 달라졌다. 전쟁과 기아만큼 전염병이 큰 사망 원인인데 손 씻기 같은 사소한 위생 습관만 고쳐도 상당 부분 예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2013년 그는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은 외무공무원 옷을 벗 고 비누사업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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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박씨와 정씨는 본지가 글로벌 문화운동단체인 월드컬처오픈(WCO)과 함께 발굴하고 있는 컬처디자이너의 대표적 사례다. 이들은 자신의 열정과 재능을 바탕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씩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 있다.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공익적인 실천력까지 겸비해 사회를 변화시킨다.

 평범한 직장인 이지혜(28)씨도 지렁이를 키워 음식쓰레기를 줄이고 물물교환으로 물건 낭비를 줄인다. 도시농부 이보은(48)씨는 옥상 텃밭에 키운 농작물을 내다 파는 장터를 만들어 팍팍한 도시의 삶을 윤기 있게 한다. 남들과 다른 작은 아이디어가 타인과 공유되며 사회적 흐름을 이뤄 간다. 아이디어와 실천이 결합해 사회를 조용히 바꾸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엔 늘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있다. 이들에 대한 당장의 해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본질적인 것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머리를 맞대고 해결할 수 있는 ‘함께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나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실천으로 옮기는 일. 이렇게 세상을 조용히 바꾸는 사람들이 진정한 영웅이고 매력 시민이다.

윤석만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