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양사기범에 살인범 못잖은 징역 13년…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분양사기 혐의로 구속기소됐던 르메이에르 건설 정경태(64) 회장에게 징역13년의 실형이 확정됐다. 분양사기 혐의 피고인에게는 내린 형으로는 이례적인 중형이다.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14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가법) 상 사기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던 정 회장에게 징역 13년의 실형을, 같은 회사 전 대표 서모(55)씨에게는 징역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확정했다.

정 회장에게 확정된 형은 특경가법상 사기 혐의에 적용되는 양형기준의 상한(13년6개월)을 거의 채운 것이다. 살인범에게도 이 보다 낮은 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허다하다.1심은 양형기준을 넘어서는 15년 형을 선고했지만 항소심인 원심이 2년을 감형한 것을 대법원이 그대로 인정한 결과였다.

법원은 왜 정 회장에게 온정을 베풀지 않았을까.

◇ 다수 피해자와 회복되지 않은 상처

법원이 인정한 범죄사실에 따르면, 정 회장은 2003년부터 ‘피맛골’을 부수고 종로구 청진동 일대에 ‘르미이에르 종로타운’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농협 등으로부터 500여억원을 대출 받았다.

그가 사기행각에 나선 건 2007~2008년 무렵 심각한 자금압박을 받으면서다. 처분권한이 없는 신탁된 오피스텔을 분양하고, 이미 분양된 상가와 오피스텔을 이중 분양하는 방법으로 3년8개월 동안 47명의 피해자에게 300억여원을 받아 가로챘다.

이날 확정된 원심의 재판부(서울고법 형사3부)는 지난해 9월 선고에서 “범죄사실로 인정된 피해 외에 이미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피해가 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봤다.

이어 재판부는 “다수의 피해자들이 노후 자금 등으로 모아놓았거나 지인들로부터 빌린 돈으로 이 사건 상가 및 오피스텔의 분양대금을 납입했다”며 “이 사건 사기 범행으로 인해 막대한 재산상 손해를 입고 오랜 시간 동안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회장은 항소심 선고때까지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회사가 부도나 정리되는 과정에서 270여명의 직원들에게 56억원에 이르는 임금과 퇴직금도 지급하지 않았고(근로기준법 위반), 금융기관으로부터 추가대출을 받기 위해 직원들에게 납세증명서를 위조시킨 혐의(공문서위조 및 행사)도 모두 유죄로 판단됐다.

◇‘만사정(경태)통’의 기업문화

정 회장은 분양사기 및 공문서 위조 혐의에 대해 “서 전 대표 등이 알아서 했을 뿐 관여한 바 없다”며 부하직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항변을 했다.

그러나 1ㆍ2심 재판부 모두 정 회장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든 업무를 세세하게 개입하고 지시하던 경영행태가 정 회장의 주장을 배척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원심 재판부는 르미에르건설의 경영 방식에 대해 “정 회장은 비서실을 통하여 2시간마다 임원들의 위치를 확인하거나 부서 간 교류를 금지하는 등의 방법으로 임직원들을 철저히 감시ㆍ통제해 왔다”고 지적했다.

“회사에서 영업에 관한 모든 것뿐만 아니라 회사업무에 대한 모든 것은 전적으로 정 회장의 직접 지시와 총괄관리 하에 이루어졌다. 회사의 분위기 자체가 다른 부서 직원들과 교류하거나 업무를 협의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자신에게 지시된 사항만 처리했다”는 부하직원들의 진술을 사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국 분양사기는 정 회장이 주도하고, 납세증명서 위조도 직접 지시한 것으로 인정됐다.

◇ “다른 사기범이랑 비슷하게 처벌해 달라”는 호소도 배척

정 회장은 상고심에서 “동종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비해 균형이 맞지 않는 처벌”이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인 사기범에 대해 집행유예 선고가 잦고 실형이 내려지더라도 징역 2~3년에 그치는 점에 기대를 건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정 회장의 나이, 성행, 지능과 환경, 피해자들과의 관계, 범행의 동기, 수단과 결과, 범행 후 정황 등을 고려할 때 양형이 심히 부당해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임장혁 기자ㆍ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