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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모두를 피해자로 만드는 외래진료시스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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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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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준
서울대 의대 교수

몇 해 전의 일이다. 호주 시드니에서 개업한 한국인 의사가 하루에 진료하는 환자 수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보건당국에 의해 고발당했다. 하루에 8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는 부적절한 행위를 47차례나 했다는 것이 그 의사의 혐의였다. 그게 죄가 된다면 우리나라 의사들 대부분이 범법자가 될 것이다. 하루 8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선 일상적인 일이며, 100명 넘게 진료하는 일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과장되긴 했지만 ‘3시간 기다려 3분 진료’를 받는 과정에서 환자들이 느끼는 섭섭함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오래 기다려 의사를 만났지만 자신의 병력과 증상을 충분히 이야기할 시간은 없고, 복잡한 검사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도 제대로 듣지 못한다. 어떤 병일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의사의 의견은 간단하기만 하다. 상황이 이러한데 환자들이 의사로부터 따뜻한 위로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며 이는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많은 환자가 같은 병으로 다른 병원에 가서 또다시 3분 진료를 받게 되는 이유다.

 그러나 사실 의사들도 피해자다. 최근 46명의 의사를 대상으로 외래 진료 전후의 집중력과 불안감을 측정해 본 일이 있다. 하루 종일 평균 4.7분에 한 명씩 모두 91명의 환자들을 진료한 의사들이 셋 중 한 명꼴로 진료를 마친 후 집중력이 저하되는 증상을 보였다. 절반 이상에서 외래 진료 후 감정 상태가 악화됐다. 의사들의 집중력 감소가 실수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적 탈진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의사들은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게 되는 ‘탈진 증후군’에 취약해진다. 이런 환경에서 의사들이 환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병에 대해 성의 있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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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도 의사도 피해자라면 가해자는 누구일까. 바로 대한민국의 의료제도다. 의료의 질보다는 양에만 값을 지불해 많은 수의 환자를 진료하도록 유도하는 거다. 진찰과 설명보다는 주로 검사에 값을 지불함으로써 되도록 많은 검사를 받도록 만드는 수가체계, 가벼운 병을 지닌 환자들도 거리낌없이 큰 대학병원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의료전달시스템이 가해자다.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우리나라 의료제도가 환자와 의사 모두를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비교적 가벼운 증상에도 병원을 찾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 문화도 상황을 악화시킨다. 201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1년에 14.3회 의사를 만났다. 이 수치는 다른 국가에 비해 높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4.4회, 핀란드 사람들은 1년에 단 2.7회만 의사를 만났을 뿐이다.

 2014년부터 복지부는 선택진료 의사를 대폭 줄이고 이를 통해 절감한 비용을 의료의 질을 높이는 데 사용하는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어려운 수술이나 중증 환자 진료 등에 보상을 더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행규칙 어디를 봐도 의사와 환자가 만나는 최소한의 시간을 보장해 정상적인 진료가 이뤄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항목은 찾을 수 없다. 그저 기계적인 공동 진료 정도만이 보상 항목에 포함돼 있을 뿐이다. 의료의 질을 높이는 기본은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뢰와 이해인데 말이다.

 미국 의사들은 평균적으로 16분에 한 명씩 환자를 진료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라고 한다. 16분에도 힘든 일을 우리나라 의사들은 어떻게 단 4.7분 만에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진찰하고,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처방하고, 거기에 더해 환자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을까. 속전속결과 박리다매를 강요하는 대한민국의 의료시스템이 환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꼼꼼하게 진찰하고,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유능하고 따뜻한 의사의 출현을 제도적으로 막고 있다.

 진료실에서 처음 만나는 환자들이 다른 병원에서 받은 검사 결과나 치료 기록을 내놓을 때가 있다. 검토해 보면 그동안 적절한 진단과 치료가 이뤄져 왔기 때문에 병원을 옮길 이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저 담당 의사의 충분한 설명과 따뜻한 공감이 필요했을 뿐이다. 우리 의료제도가 유도하는 진료시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임은 물론이다.

 수가 체계의 과감한 개선을 통해 처음 병원을 찾는 환자에게라도 최소한의 진료시간을 보장하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의료비용을 줄이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처음 만나는 환자들을 자세히 진찰함으로써 꼭 필요하지 않은 검사들을 줄일 수 있고, 환자들이 같은 증상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며 사용하는 비용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차등수가제’와 같이 환자를 많이 진료하는 의사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정책은 사양한다. 이 정책은 이미 실패작으로 판명돼 폐기된 바 있다. 반대로 충분한 진료시간을 장려하고 이에 대해 확실히 보상하는 통 큰 정책을 복지부에 부탁한다. 이것이야말로 요즘 회자되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아닐까.

 이제는 우리도 세계 7위 무역대국에 걸맞은 정상적인 외래진료시스템을 갖출 때가 됐다.

임재준 서울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