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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10분새 45억 '사촌 절도단'… 처음엔 형사도 믿지 못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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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촌’이 말했다.


"그게 2015년 11월이니까 두 달쯤 됐나? 윤모(37)가 갑자기 전화를 했어. 45억원을 한바퀴 돌려서 세탁할 수 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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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사업적으로 좀 알고 지냈지. 나야 조폭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삼촌’으로 환치기 업계에서도 좀 알려졌으니까 그런 건 일도 아니야. 수수료 두둑히 챙겨달라고 하고 바로 조 여사한테 연락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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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여사 하면 이 바닥에선 다 알아. 동대문에서 환치기로 유명한 큰 손. 큰 형님하고 한 번 만난적 있는데 대포폰을 7대나 굴리면서도 통화 끝나면 깨끗하게 기록 다 지울정도로 깔끔하더라고. 처음엔 45억원이라니까 무슨 구린 돈 아니냐고 걱정을 좀 하더구만. 나도 정확히는 몰랐다고, 45억원이 무슨 돈인지…"


#. 2015년 11월 7일 새벽, A사 사무실 

우산을 낮게 내려쓴 윤이 비를 뚫고 서울 강남구 역삼동 A사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모자를 푹 눌러 쓴 윤은 망설임 없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계단을 올라 사무실 금고로 향했다. 금고 비밀번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금고 속에서 통장 3개와 비밀번호가 적힌 서류, 보안카드 등을 챙겼다. 10분 정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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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밖으로 나온 윤은 빗속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45억원….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일 잘 끝났어.”

#.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3팀

사건 내용을 알게 된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3팀 김지훈 형사는 고민에 빠졌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20년 경찰 생활을 하면서도 한 번에 현금 45억을 훔친 사건은 들어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막연히 "현금 절도 사상 최고액일 것"이라 생각했다.

김 형사가 가본 A사는 난리통이었다. 운영자금이 다 사라져 폐업 직전이었고, 자금 관리 여직원은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김지훈 형사가 말했다.

"사무실 문이나 창문에 침입 흔적이 없었어요. 폐쇄회로(CC) TV를 수십 번 돌려봐도 장비를 든 사람이 안 보였죠. 딱 한명, 모자 쓴 남자가 새벽에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간 것 밖에는. 나중에 보니 그게 윤이었습니다. 그때 내부자가 관여돼 있다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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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해보니 150여 명의 직원 중에 딱 한 명 행적이 묘연한 사람이 있더군요. 사건 직후 외국으로 출국한 변씨(31)였습니다. 하지만 직원들은 '변은 금고 번호를 알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변은 사건 한 달 반쯤 전에 온 파견 직원이었다. 변을 소개한 건 A사 전산망을 설치해 준 업체 직원 김모(37)씨였다. “회사에 상주하며 전산을 관리해 주는 직원이 있으면 좋을 것"이란 이유였다. 김 형사가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근데 변씨가 참 이상해요. 전산 관리로 소개받아 왔는데 전산 업무와는 거리가 멀거든요. 대학 땐 연극영화를 전공했고, 여기 오기 전엔 강남 유명 클럽에서 영업상무를 했더라고요. 회사 다니면서도 밤엔 클럽가서 일하고요. 회사에선 전산업무를 전혀 못하니까 그냥 운전이나 간단한 행정업무를 시킨 모양이에요. 그러다 45억이 사라지면서, 변도 같이 사라진 거죠."


#. 2015년 12월 7일, 사라진 변의 은신처를 덮치다

윤과 변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 경찰은 중국으로 출국한 변이 한국에 온 걸 알고 은신처를 덮쳤다. 지난해 12월 7일. 장롱 안에 숨어 있던 변은 처음부터 딱 잡아 뗐다고 한다. 그러나 잠시 후 방에서 한화ㆍ달러ㆍ위안화 등 돈뭉치와 대포통장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모두 합쳐 7억80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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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형사는 변을 구속하고 추궁을 시작했다. 김 형사가 말을 이었다.


"변은 아마 자기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에서 우리가 중요한 단서를 포착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을 겁니다. 변이 '젊었을 때 의류 유통 업체 B사를 운영한 적이 있다'고 했는데, 절도범 윤이 사용한 대포폰 명의자가 바로 B사였던 겁니다. 그래서 그 회사 기록을 확인해보니 대표가 변에서 윤으로 바뀌었더라고요. 이거다 싶었죠. 조금 더 파보니, 변과 윤은 이종사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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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변이 사무실과 비밀번호를 윤에게 알려주고, 윤이 훔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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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된 변은 "금고 비밀 번호를 다른 직원 책상에 붙어 있던 메모를 보고 알았다"고 했다. 윤이 통장을 들고 나온 뒤 인터넷뱅킹으로 그 안의 돈을 대포 통장으로 보낸 사실도 진술했다. 그는 "사건 직후인 바로 그 시점부터 돈세탁이 시작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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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형사가 말했다.

"돈세탁이 된 뒤에는 자기들끼리 홍콩에서 파티도 벌인 것 같더라고요. 변과 윤은 물론이고 자금 세탁을 도와준 삼촌까지… 마카오까지 건너가 질펀하게 놀았더군요. 삼촌은 옛 조폭 시절 부하들까지 데리고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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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대문 '조여사'가 말했다.

"삼촌 전화가 왔을 때 움찔했죠. 금액이 좀 커야 말이죠. 이 바닥에서 잔뼈 굵은 저지만, 영 찜찜해서 ‘홍콩’한테 부탁했습니다. 홍콩은 홍콩에 있는 환치기 업자의 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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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이 흔쾌히 해준다길래 넘겨버렸죠. 아마 홍콩이 대포통장으로 몇 번 돈을 굴리고 동대문에서 심부름 해주고 먹고 사는 인출책 패거리를 통해 현금으로 바꿨을 겁니다. 세탁된 돈은 다시 삼촌과 윤에게 갔겠죠.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집니다."

 #. 최덕근 강력3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조여사, 홍콩, 동대문 인출책…. 정말 복잡했습니다. 정리를 해도 한 눈에 사건 개요가 머릿 속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니까요. 절도 사건이 이렇게 복잡한 것도 흔치 않은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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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근 강남경찰서 강력3팀장은 자금 흐름을 역추적해 가장 말단에 있는 인출책 패거리부터 잡아 들였다. 보이스피싱 자금을 인출해주고 수수료 조금씩 받는 '잡범'들이었다. 최 팀장이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인출책들이 수사에 도움이 됐습니다. 우리가 '설득 작업'을 좀 했죠. '그런 돈인 줄 모르고 심부름만 했다.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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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팀장은 인출책들을 통해 알게 된 ‘홍콩’을 경찰서에 출석시켰다.  "피해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는 말에 홍콩도 수사에 협조적으로 나왔다. 그 역시 “조여사에게 부탁받았다”고 실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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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팀장은 '홍콩'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조여사를 경찰서로 불러들였다. 조 여사 역시 "그런 돈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의뢰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며 발을 뺐다. 그는 오랜 고객인 '삼촌'의 존재도 실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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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수 개월에 걸친 수사 끝에 삼촌 등 사건 관련자 12명을 검거했고, 그 가운데 변은 구속했다. 최덕근 강력3팀장이 말했다.

"윤은 아직 중국에 있는 것 같습니다. 변이 갖고 있던 돈이 7억8000만원, 삼촌 등이 수수료로 받아간 돈이 한 5000만원, 나머지 30억 넘는 돈은 윤이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리 팀 전원이 한 달 반 동안 쪽잠 자며 추적했습니다. 사건 기록만 A4용지 1만장…. 45억 절도 사건의 핵심은 윤입니다. 반드시 그를 붙잡아 돈을 되찾을 겁니다."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삽화=심정보 디자이너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일어난 45억원 절도 사건을 최덕근·김지훈 경위 등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 3팀 형사들을 통한 취재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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