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묄렌도르프를 위한 변명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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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호 30면

구한말에 한반도에서 활동한 외국인이 여럿 있다. 프러시아 사람으로 외교고문을 지낸 묄렌도르프, 한반도 근대 의학의 창시자 가운데 하나인 앨런, 3·1 운동을 세계에 알린 스코필드와 테일러, 선교사 언더우드 등은 이 시기 한국사를 살피다 보면 한 번은 만나게 되는 외국인이다. 하지만 이중 묄렌도르프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미지는 좋지 않은 편이다. 격동의 구한말 김옥균 등 개화파에 반대해 수구세력을 도왔고 열강의 각축 속에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였다는 점 등이 실점(失占)의 요인인 것 같다. 묄렌도르프를 자기 곁에 두려 했던 고종의 이미지와 맞물려, 그에게 조선 망국의 책임이 있다는 선입견마저 품게 된다. 필자 역시 '구한말의 긴박한 정국을 헤쳐나가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던 외국인' 이라는 막연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2012년 만주어 공부를 시작하면서였다. 초급 만주어 교과서 맨 앞에는 만주 문자를 알파벳으로 어떻게 표기하는지가 나와 있었다. 교과서에서는 그 표기법을 ‘묄렌도르프 방식’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이 묄렌도르프하고 구한말에 한반도에서 활동한 묄렌도르프는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찾아보니, 정말로 그 묄렌도르프였다.


묄렌도르프는 1882년 양무운동을 주도했던 청나라 말기 정치가 이홍장(李鴻章)의 후원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홍장의 뜻과는 달리 러시아를 조선에 끌어들이려다가 1885년에 청나라로 강제 송환됐다. 그 후 그는 중국 동해안의 국제 무역항 닝보(寧派)에서 해관 세무사로 근무하면서 『만주어 문법』(A Manchu Grammar, 1892년)을 비롯해서 중국과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 대한 많은 책을 썼다. 그리고 1896~97년엔 영국 왕립 아시아 학회 중국지부의 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묄렌도르프가 죽은 뒤, 그의 부인 로잘리는 묄렌도르프가 남긴 문건을 정리해서 『전기』(신복룡·김운경 번역 참조)를 간행했다. 전기의 서문에서 로잘리는 외교관이나 정치인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남편의 모습을 부각해 그리고 있다.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독일의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문화재를, 그리고 연세대의 허경진·유춘동 팀이 러시아의 동방학연구소에 소장된 한국 고서를 조사해서 그 결과를 보고했다. 이들 기관에는 묄렌도르프가 수집한 한국 유물과 고서가 다수 소장되어 있으며, 모두 학술적 가치가 크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묄렌도르프는 외교관·정치인·세관원임과 동시에 중국학자(sinologist)였을 뿐 아니라, 날카로운 감식안을 지닌 컬렉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발견을 통해 필자는 "내가 정말로 묄렌도르프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됐다. 지난 100여 년간 한국에서는, 묄렌도르프라는 사람의 다양한 측면 가운데 하나의 모습만을 바라보면서 왈가왈부해온 것이 아닐까. 나아가 조선국의 존립을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한 묄렌도르프를 눈엣가시로 여긴 서구 국가들의 관점에 물들어, 그가 조선에서 펼치고자 한 뜻을 폄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다. 목인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갖고 있어서 ‘목 대감’으로 불릴 정도로 높은 관직을 받았던 그를 미국 외교관이 “조선 왕처럼 행세한다”고 비난했던 것처럼 말이다.


묄렌도르프에 대한 나의 평가는 아직 의문부호다. 묄렌도르프와 조선. 애초에 현실 정치에 뛰어들기에는 부적절한 학자가 어설프게 정치적 야망을 품고 동양의 작은 나라에 왔다가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동양을 경영해’ 이름을 날리려다 그 뜻이 좌절되자 학문에 몰두한 케이스일까. 어떤 경우든, 다양한 영역에 걸친 묄렌도르프의 활동을 모두 검토한 뒤에야 그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묄렌도르프의 공과에 대한 판단은 그런 뒤에 내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김시덕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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