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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절뚝이던 ‘똥말’의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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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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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0만원짜리 ‘천구’가 한국을 대표하는 말로 성장했다. 서인석 조교사는 “천구는 골반 골절 때문에 지금도 왼쪽 뒷다리를 절뚝거린다. 그래도 아주 영리하고 단단한 말”이라고 말했다. [사진 한국마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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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석 조교사. [사진 한국마사회]

지난 2014년 5월 미국 메릴랜드주 루터빌 티모니엄에서 열린 경주마 경매장. 별 볼 일 없는 혈통에 빛깔도 그저 그런 수말(당시 2세)에 대한 입찰이 시작됐다. 마주(조금제씨)의 위탁을 받고 경매에 참여했던 서인석(48) 조교사는 “덩치도 작아 보였고, 걷는 모양도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눈이 또랑또랑 빛나서 경매에 참여했다. 가격이 더 비쌌다면 사지 않았을 것”고 말했다. 혈통 좋은 말은 10만 달러 정도를 줘야 하지만 이 말은 2만5000달러(약 2900만원)에 낙찰됐다.

왜소한 체격에 걷는 폼도 어색
미국서 2900만원 헐값에 데려와
골반 골절 탓 걸을 땐 불편하지만
달릴 땐 문제 없어 국내서 훈련
8회 경기 출전해 5회 깜짝 우승
세계 5대 경주 두바이 대회 도전

 주위에서는 “미국까지 가서 ‘똥말(성적이 저조한 말)’을 사오느냐. 1200만원이나 드는 수송비가 아깝다”며 비아냥댔다. 마주 조씨는 똥말을 ‘천구(天球·천체의 위치를 나타내는 구면)’라 불렀다. 이름이 너무 거창해서 똥말은 되레 초라하게 느껴졌다.

 2016년 1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메이단 경마장. 16개국에서 온 181마리의 경주마가 두바이 레이싱 카니발을 준비하고 있다. 천구도 그 중 하나다. 오는 8일 0시 1200m 레이스에서 천구가 14마리 가운데 5위 이내에 들면 상위 레이스에 진출할 수 있다. 똥말 취급을 받았던 천구가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 한국을 대표하는 말이 된 것이다.

 천구가 달려온 길은 기적의 레이스였다. 기수가 천구를 타보더니 “이 놈, 못 쓰겠다”고 했다. 속보 때 왼쪽 뒷다리를 절뚝였던 것이다. 검사 결과는 왼 골반 미세 골절. 데뷔 전에 경주마로서의 운명이 끝날 처지였다.

 그러나 서 조교사는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다. 훈련을 중단시키고 두 달 동안 천구를 관찰했다. 속보를 할 때는 여전히 불편해 보였지만 습보(襲步·앞뒤 양 다리를 모았다가 내딛는 주법)엔 문제가 없었다. 통증도 느끼지 않는 걸 확인하고 다시 훈련을 시켰다.

 보기와는 달리 천구는 준마(駿馬)였다. 왜소해 보였지만 체중은 다른 말과 비슷한 480㎏ 정도를 유지했다. 그만큼 근육량이 많은 것이다. 서 조교사는 “공식 경기를 앞두고 주행검사를 했는데 5등으로 턱걸이했다. 특이했던 점은 결승선을 앞둔 4코너에서 빠르게 치고 나간 것이다. 2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말이 레이스가 뭔지 알더라”며 웃었다.

 2014년 12월 6일 렛츠런파크서울에서 천구가 공식경기에 데뷔했다. 첫 레이스부터 1위를 차지하더니 8차례 경주에서 5번이나 우승했다. 나머지 3차례 경주에서도 2위 1번, 3위 2번을 기록했다. 천구가 1년 만에 한국 최정상급 경주마가 되자 그의 부마(父馬) ‘올드패션드’도 씨수말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아들 덕분에 아버지도 귀족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후 천구는 세계를 달리고 있다. 지난해 7월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아시아챌린지컵 대회에 나섰고, 10월에는 일본에서 열린 한·일 인터랙션컵에서 입상(4위)했다. 이번 두바이 레이싱 카니발에서 2승을 거두면 결승 대회인 두바이 월드컵(3월)에 진출한다. 세계 5대 경마 대회 중 하나인 두바이 월드컵에는 가장 많은 우승 상금(600만 달러·약 71억원)이 걸렸다.

 경주마의 국제대회 참가엔 상당한 부담이 따른다. 까다로운 검역절차를 거쳐야 하고, 말은 거의 하루종일 트레일러에 갇혀 있어야 한다. 보통 말들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천구는 낯선 기후와 사료에도 빠르게 적응한다. 서 조교사는 “해외 대회를 다녀올 때마다 기량이 눈에 띄게 는다. 그래서 국제대회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천구의 1200m 최고 기록은 1분11초인데 1분10초안에만 들면 첫 레이스에서 입상할 수 있다. 현지 경기장 흙이 좋아 순위권 진입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2년 전 천구를 사왔을 때는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말이었다. 요즘 말로 ‘흙수저’였다. 녀석의 장점을 믿고 마음껏 뛰게 해줬더니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며 흐뭇해 했다. 한국과 유럽·일본 경주마의 기량차는 여전히 크다. 보잘 것 없었던 ‘흙수저’ 천구는 오늘도 뛴다. 세계와의 격차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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