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화 정신’ 망각한 중국, 海禁정책 펴다 식민의 아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60호 4 면

정화는 62척의 선단과 2만8000여 명의 승무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원정대를 이끌고 모두 7차례에 걸쳐 탐험에 나섰다. 동남아시아의 자바·수마트라, 인도양 콜카타,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는 물론 동아프리카의 아덴·모가디슈까지 원정항해를 감행했다. 푸젠성 창러에 위치한 원정대의 석상. 이들은 1492년 신대륙에 도착한 콜럼부스보다 무려 87년 먼저 대항해를 시작했다. 당시 중국의 굴기는 이후 해양무역을 금지한 명나라 왕조의 오판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빌미를 제공했다. 푸젠성=김춘식 기자

해양 실크로드 문명사의 첫걸음을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앞세우는 중국 정부는 정화(鄭和)의 대원정이 시작된 난징(南京) 정도를 기점으로 잡는데 정화는 명나라 사람이니 한참 후대의 일이고, 고민 끝에 광저우(廣州)로 날아갔다. ‘광둥 해상 실크로드 박물관’에서 시작하면 남중국해 해양 실크로드의 신비를 파헤쳐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취재팀을 태운 비행기가 광저우 공항에 착륙한 건 지난해 11월 30일. 박물관이 있는 하이링다오(海陵島)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광시(廣西)자치구 방향으로 반나절을 달려 박물관에 다다른 일행은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되고 말았다. 말이 박물관이지 상식을 뒤엎는다. 심해에서 인양한 무역선이 통째로 진열돼 있는데 침몰선과 함께 주변의 흙과 물을 그대로 건져 올려 H빔을 세우고 지붕만 덮은 공장 같은 풍경이다. 침몰된 무역선에선 수중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추가 발굴될 선박을 염두에 뒀을까. 굳이 해양 실크로드 ‘1호 박물관’이란 간판을 달았다.

갯벌과 침몰선 통째로 건져내 발굴작업 길이 30m, 높이 9.8m 규모의 선박은 송나라 원해 무역선이다. 해저 20m 지점, 그것도 갯벌에 2m 깊이로 박혀 있던 것을 1987년 광저우 구조국 소속 영국인 잠수사가 발견한 이후 ‘난하이 1호’로 공식 명명(89년)됐고, 2007년 12월 물 밖으로 나왔다. 중국인이 담대한 발상으로 거대한 고선박을 통째로 끌어올렸으니 세계 고고학사의 빛나는 성과라고 할 만하다. 침몰선에선 귀걸이·목걸이·반지 같은 금제 귀금속과 은제 그릇, 도자기 술병과 주발·접시 등 푸젠요를 포함해 7만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송대 무역선은 푸젠(福建)에서 도자기, 금은 세공품, 비단, 차 등을 싣고 하이링다오 앞바다를 관통해 광시성 북해(北海)를 거쳐 통킹만을 거슬러 내려가 믈라카 해협이나 인도양, 페르시아 등지로 항해했다. 늘 지나가던 항로였는데 그날따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엄청난 파고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침몰했다. 사람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배의 임자는 누구였는지 남은 기록은 하나도 없다. 선박의 재질이 남중국해에서 자라는 소나무란 게 밝혀져 광저우·푸젠·광시 등지에서 건조된 배라는 걸 짐작할 뿐이다.


육상 실크로드에 비해 해상 실크로드는 덜 주목받거나 무시됐다. 해양사는 흔적을 두루 남기는 육지와 달리 유사무서(有史無書)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있으나 기록이 제한적이고 남아 있는 증거도 해저에 숨어 있다. 반면 도굴꾼 손에 유린당하는 유적과 달리 난하이 1호선처럼 박물관을 차릴 만한 양질의 증거물을 느닷없이 제시한다. 오늘날 태안반도 해저 유물에서 발견되고 있는 도자기처럼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바다 건너온 물건은 인기 품목이다. 인간은 호기심 많은 동물이고, 그 욕망의 서사는 바닷길을 끝없이 이어지게 했다. 사람들은 이 같은 무역선 왕래를 해양 실크로드라고 명명했다. 배에 실린 엄청난 양의 도자기를 근거로 볼 때 ‘세라믹 로드’가 비단보다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문학적으로 ‘바다의 서사시’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


여정은 광저우 시내 황푸(黃)의 황푸고항(古港)으로 이어진다. 한국 독립운동사와 연관이 깊은 황푸군관학교가 있던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한가롭게 작은 배들이 10여 척 떠 있고 이따금 관광객이 들르는 한적한 포구로 변모했지만 황푸촌은 북송 시기에 건립된 마을이다. 북송 때 이미 많은 배가 이곳에 정박했고 청나라 중·후기에는 중국 유일의 통상부두로 자리매김했다. 기념관(?海第1關記念館) 돌기둥에 각인된 “사해에서 구름처럼 배가 와 닿고 오주의 무역상인이 찾아 들어온 신주(神州)”라는 글에서 화려했던 시절을 느낄 수 있다.


송나라는 해상 강국이었다. 명대에서도 정화의 대원정을 보내는 등 대외 진출에 진력했지만 영락제(永樂帝) 이후 정치 주도권이 환관과 관료들에게 넘어가면서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 와중에 왜구의 준동으로 남부 해안가가 황폐해지자 왜구를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대형 선박 제조를 금지하고 바다를 통제하는 ‘해금(海禁)’정책을 폈다. 이후 중국은 제해권을 상실하면서 서구 열강의 침입을 허용하는 역풍을 맞게 된다. 당시 광저우엔 일종의 ‘바다로 열린 바늘구멍’이라고 할 시박·해관 등이 설치됐다. 시박은 당나라 시절에 교역 등의 목적으로 중국 포구를 찾아왔던 외국 상선의 총칭, 시박사(市舶司)는 이들 외국 선박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은 관직이었다. 남송·원·명·청을 거치면서 시박제도는 소멸과 재생을 반복했다. 홍무 7년(1374년)엔 시박사를 한꺼번에 폐지해 버린 적도 있다. 조공 공무역만으로도 무역체제를 유지하고 왜구를 막을 수 있다는 ‘해금’ 명분론이 개방 교역론을 압도한 결과다.

1 영국상인들로부터 몰수한 아편을 불태워 아편전쟁을 촉발한 임칙서(가운데). 2 중국 최초의 회교사 원인 취안저우 칭징쓰(?淨寺).

중국 해양력 쇠퇴 상징하는 황푸 촌 아편전쟁 이후 홍콩·마카오 등을 통해 물밀듯 들어오던 서양 무역선이 즐비하던 포구마을, 황푸 촌을 찾았다. 바다를 포기한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황푸 촌이 웅변해 주는 듯하다. 소박한 포구라 구경거리는 되겠지만 이 정도 규모로 서구 열강의 공격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중국의 해양력이 가장 왜소했던 시절의 상징이다.


송나라 시절 원양 항해를 떠나기 전 하늘에 제사 지내던 남해신묘(南海神廟)를 찾아 나섰다. 난하이 1호선의 마지막 출항지가 이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광저우 시내의 복잡다단한 구시가지 복판에 숨겨져 있는 데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으로도 검색이 안 돼 찾는 데 애를 먹었다. 막상 당도한 신묘 주변의 풍경은 너무도 볼썽사나웠다. 거룩한 성소는 화력발전소의 웅장한 높이에 압도당해 숨죽이듯 파묻혔다. ‘개발도 좋지만 문화유산 주변 경관도 봐가면서 하지’라는 푸념이 절로 나왔지만 초고속으로 내달리는 중국이니 어쩌랴.


제사를 봉헌하고 배가 떠났던 선착장은 지표면 수 미터 아래로 내려갔지만 그래도 천년 넘은 층계는 잘 보존했다. 국가 제례가 봉헌된 신묘이므로 화려하기가 하늘을 날 것 같고 비석거리처럼 금석문이 줄지어 섰다. 단연 한유(韓愈·768~824)가 남긴 비문이 눈길을 끈다.


“海於天地間 爲物最鉅(바다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물건으로는 가장 큰 것).”


대항해의 출항 전 신에게 순풍과 무사를 기원하는 제를 지내는 건 동서고금의 전통이다. 그중 남해신의 지위가 가장 높다고 했다. 우리나라 양양에 동해신묘가 남아 있고 남해신묘가 복원된 것도 고대 중국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일행이 광저우를 떠나 푸저우(福州)에 도착한 날은 지난해 12월 2일이었다. 푸저우 공항을 출발, 도심으로 들어가기 전 소도시 창러(長樂)를 지났다. 창러에서 타이완(臺灣) 해협을 건너가면 바로 타이완이다. 바다 길목에 있는 민(?)강을 통해선 마웨이(馬尾) 경제기술구와 연결된다. 창러 시내에 정화공원이 있다. 해양 실크로드 대원정(1405~33)에 나섰던 명나라 환관 정화가 제4차 항해 중(1412)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북송(1096) 때 세운 삼봉사탑이 일종의 등대탑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역풍이 불기를 기다리면서 머물던 정화를 기념하는 14.5m의 거대 석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정화는 놀랍게도 1405년부터 28년간 7차례의 대항해로 인도양은 물론 호르무즈 해협, 아프리카 동부 연안까지 다녀왔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보다 90여 년을 앞선 기념비적 기록이다. 정화는 서역에서 중국 윈난(雲南)으로 이주해 온 무슬림 출신이다. 명나라 군대에 입대해 큰 공을 세워 영락제의 신임을 얻어 환관이 됐고 이때 ‘정(鄭)’이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정화는 자신이 떠나갔던 바다를 향해 황제가 준 두루마리를 들고 서 있다.


동상을 세운 의도는 분명하다. 대항해 출발지 기념의 뜻도 있지만 21세기 실크로드가 푸젠성에서 다시 시작됨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강가에서 조금 올라가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정화기념관과 거대 돌배가 서 있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를 연 포르투갈 엔히크 왕자의 서거500주년을 맞이해 1960년에 세운 리스본 엔히크기념탑에 대항하는 중국 버전일까. 리스본시민들은 높이 52m에 달하는 배 모양 기념 조각상을 대양을 건넜던 용감한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 헌정했다. ‘해양왕’으로 불리던 왕자가 앞장서고 항해사·과학자·성직자들이 뒤를 따른다. 정화의 대항해는 이보다도 무려 50여 년 앞섰다. 그 정화가 20여m의 웅장한 돌배 위에 우뚝 서서 해양 실크로드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2007년 물 밖으로 나와 아직도 발굴작업이 진행 중인 광둥 해상 실크로드 박물관의 무역선.

林則徐 동상 세워 아편전쟁 교훈 환기 푸저우 박물관 앞에는 단호하게 아편을 불질러 아편전쟁의 촉매로 작용했던 임칙서(林則徐·1785~1850)의 동상이 있다. 우리의 서울 인사동에 해당하는 싼팡치샹(三坊七巷)에는 임칙서기념관이 있어 ‘우리는 이렇게 당했다’는 역사의 교훈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영국과 벌인 두 차례의 아편전쟁(1839~42년, 1856~60년)은 중국을 ‘제국’과 ‘식민’으로 갈라 놓았다. 그로부터 150여 년, 중국은 ‘평화굴기’를 내세우며 새로운 ‘하서양(下西洋)’ 실크로드 대항해를 시작하고 있다. 민강의 정화 동상과 돌배는 오늘의 중국이 요구하고 희망하는 ‘일로(一路)’에 최적의 문명사적 조건을 제공하는 셈이다.


푸젠성은 오늘날 동남아를 비롯, 세계 곳곳에 뻗어 있는 ‘화교의 뿌리’ 격인 곳이다. 진(秦)·한(漢) 때 월(越)족이 푸젠 지방에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민월(?越)이라고 불렀다. 월의 수도였던 푸저우의 박물관 전시물 중 상당 부분은 민월인들의 풍습과 관련된 유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민월인은 북방에서 내려온 한족과 달리 배를 능숙하게 다루고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아 끊임없이 바다로 진출했던 민족이다. 오늘의 베트남을 월남(越南)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들 월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중국 대륙의 남쪽 변방엔 한족과 다른 강인한 해상세력이 웅거했음을 증명한다. 중국을 한족 중심 사고만으로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화교의 다수는 민월 출신이다. 지질학적으로 보면 간빙기가 시작돼 바닷물이 상승하기 전, 중국 대륙과 타이완·한반도와 일본은 육지로 연결돼 있었고 민월인들이 남방이나 태평양으로 퍼져 나간 장기 지속의 역사가 있다. 그 후 역사 시대로 들어와 천부적 해상세력이었던 민월이 저력이 돼 한·당·송 등을 거치면서 해양 실크로드의 동력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후대의 민월은 화교로 변신해 동남아로 나아갔다. 동남아 곳곳에서 보이는 복건회관·광동회관 등의 간판은 민월의 천부적 해양력을 암시하는 증거물들이다.


푸젠성 사회과학원을 들렀다. 리훙제(李鴻階·54) 부원장의 말에서 푸젠의 화교 DNA를 느낄 수 있다.


“푸젠은 삼면이 산으로 에워싸고 앞바다만 열려 있지요. 농지가 상대적으로 척박해 일찍이 바깥으로 눈길을 돌렸어요.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조건이었죠. 광저우 사람들도 화교가 많지만 푸젠은 밖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사람보다 더 많아요.”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