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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마누엘 칼럼

정치인들에게 기적을 기대할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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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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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기업인 출신으로 정치인이 된 안철수 의원이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기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 나 또한 안 의원의 이번 ‘벤처 사업’에 정치인 누구누구가 ‘합류한다’ 혹은 ‘안 한다’는 후문을 듣고 있다.

문제는 제도권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보통 유권자의 인식
밑바닥 지역사회부터 바뀌어야
정당·정치인도 시민 문제에 관심

 일부 친구들은 ‘안철수 신당’이 정체돼 있는 여의도 정가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은 몇 가지 의례적(ritualistic)인 변화가 있고 또 한 번 당명이 바뀌는 것뿐이지 정치가 예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들은 이렇게 비유한다. 환상적인 모습의 구름이 하늘을 수놓으며 지나간다고 해서 우리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연관성이 없다. 정당과 보통 시민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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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롭게도 비슷한 몸부림이 미국 정치에서도 민주당을 무대로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대선 후보인 버니 샌더스가 새로운 정당의 창당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샌더스는 힐러리 클린턴의 지지자들로부터 민주당 당내 통제권을 탈취하려고 한다. 재계의 이익과 가까운 현재의 민주당을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다.

샌더스의 지지자들은 데비 와서먼 슐츠 민주당전국위원회(DNC) 의장을 상대로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슐츠 의장은 2008년 힐러리 선거운동본부의 공동 본부장이었다. 그는 이번 선거 과정에서 힐러리 쪽에 유리하도록 편향됐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안철수 의원과 샌더스 후보의 지지자들이 희망하는 것은 그들의 지도자들이 기성 정치인들과 맞붙어 싸워 정치와 재계·매체 간의 은밀한 고리를 끊고 보통 시민이 필요로 하는 것에 정치인들이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문제의 본질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정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다. 다음과 같은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은 지도자가 아니라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은 많지 않다. 그들이 투표하는 이유는 그들 시민을 대신해 문제를 해결할 사람들을 선택하기 위해서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 시민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지 않아도 되게 말이다.

 정치학자인 테다 스카치폴(Theda Skocpol)은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종언을 맞이한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저서에서 원인을 짚어내고 있다. 『민주주의의 쇠퇴 : 미국 시민 생활의 변모(Diminished Democracy : From Membership to Management in American Civic Life)』라는 책에서다. 이런 내용이다.

40여 년 전 많은 미국 시민이 해외전쟁참전용사회, 프리메이슨, 라이온스클럽 같은 단체들의 회원이었다. 이들 단체는 내부적으로 선거나 위원회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천했다. 또 이들 단체에는 기득권층(the establishment)뿐 아니라 노동계급 출신의 회원들도 포함됐다. 오늘날 이러한 유형의 거버넌스(governance)에 참여하는 사람은 소수다. 점점 더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또 우리 인생에서는 민주적인 과정에 대한 능동적인 참여가 결여됐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을 보기만 해도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20여 가구가 같은 아파트 공간과 같은 복도·진입로를 공유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이름을 아는 이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울리기 위해서라든가 시설을 개선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함께할 수 있을까를 의논하기 위해 모인 적은 한 번도 없다. 우리의 공동 이익을 위한 공동체도, 시민적 담론(civic discourse)도 없다. 기저(基底)부터 민주적인 과정이 없는데 어떻게 사회 상층부의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투표만 잘하면 ‘민주주의’가 시작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적인 핵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정당들은 가장 낮은 단계의 정치문화에 부응하면서 발전한다.

지역 공동체의 결정이 거주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공동체 일원들이 지역 봉사활동에 참가할 그 어떤 의무도 느끼지 못한다면, 또 이웃과 함께 뭔가를 위해 노력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시민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정당들이 대신해 줄 것이라고 진심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얄궂게도 지금보다 덜 민주적이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 한국 사회는 당면한 사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모임의 기회를 훨씬 더 많이 제공했다. 만약 시민의 기대에 진정으로 부응하는 민주사회를 미래에 건설하는 게 우리의 바람이라면 전통 한국의 마을 문화가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참여적 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를 제도화하려면 우리는 살고 있는 지역사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시작해야 한다.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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